이슈2024-02-06 10:44

‘악화’ 여론조사 합작한 최종현학술원-한국갤럽

최종현학술원, 응답 유도하고 제멋대로 해석 한국갤럽, 창립 50주년이 아깝고 부끄럽다

신창운

최종현학술원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15일부터 올 1월 10일까지 대면면접 방식으로 18세 이상 국민 1,043명에게 질문한 북핵 인식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언제나 그렇듯 연합뉴스를 비롯해 여러 언론들이 일제히 받아쓰기에 나섰고, 5일 밤 KBS 뉴스9에 버젓이 소개됐다.

SK그룹 최종현 회장, 한국갤럽 박무익 회장 이름값이 있는데,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여론조사를 기획 의뢰하고 또 실시해 공표까지 할 수 있는지 그 배경과 전말이 궁금하다. 어렵게 입수한 보도자료와 그래프 자료, 연합뉴스 기사를 토대로 해당 여론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조사를 의뢰한 학술원은 응답을 유도하고 그 결과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우선 북한의 비핵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당연한 인식이 반영될 수 있도록 질문을 만들었다. “북한은 작년에 핵 선제 타격을 법제화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금년에 사회주의 헌법을 수정하면서 핵무기 불포기를 선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라고 말이다.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김 위원장이 선언했는데, 비핵화가 가능하지 않은 건 당연하지 않는가. ‘국민 91% 북한 비핵화 가능하지 않아’라는 제목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전혀 가능하지 않다’ 41.4%, ‘가능하지 않다’ 49.7%를 합산한 결과란다.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응답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일반 국민에게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고 위협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만들기도 했다.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MIRV(다탄두각개목표재돌입체) 등 미사일 기술 개발을 통해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이 가능한 상황에서 미국이 자국에 대한 북한의 핵 공격 가능성을 무릅쓰고 한반도 유사시 핵 억지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북한의 핵 공격 가능성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 억지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 있는 셈이다.

유도 질문을 통해 원하는 응답을 만들어낸 후 이에 대한 해석은 제멋대로다. 앞의 질문, 즉 유사시 미국의 핵 억지력 행사 여부에 대해선 부정적 입장이 60.8%로 긍정적 입장(39.3%)보다 높았다. 그렇게 유도했으니 예상된 결과였다. 긍정(51.3%)이 부정(48.7%)보다 근소하게 높았던 지난 해와 달랐는데, “한국민의 미국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다기보다 북한 핵무기 개발의 고도화와 광폭해진 도발 자세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미국에 대한 신뢰도 조사결과가 있는지, 북한의 광폭한 도발 자세가 새삼스러운 건지 묻고 싶다.

지난해에도 학술원은 유도 질문을 통해 우리 국민 76.6%가 독자적 핵 개발이 필요하다는 응답을 이끌어낸 적이 있다. 한국민의 높은 독자 핵 개발 지지 여론을 보여주는 수치로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고 자랑했었다. 그런데 올해 조사에선 지난해보다 소폭 감소한 72.8%로 나타났다.

“(독자 핵 개발 필요 응답 비율이) 작년에 비해 4%포인트 낮아진 것은 워싱턴 선언과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를 통한 안보협력 강화 결과와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그런 선언과 정상회의를 알고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오차범위 이내의 미세한 비율 감소를 그냥 받아들이면 될 텐데 학술원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엉뚱한 해석을 풀어놓고 있다. 조사결과와 무관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3자 협력 수준으로 북한 핵 위협이 해소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미일 간 군사안보 협력이 더욱 고도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여론조사 어디에서 그런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현미경을 들여대야 할 것 같다.

조사를 의뢰 받아 수행한 한국갤럽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고인이 되신 박무익 회장을 비롯해 회사를 거쳐간 많은 선배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조사기관으로 발전 성장하는데 기여했다.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갤럽이란 이름을 보고 조사를 의뢰하고 결과를 신뢰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반세기에 걸쳐 쌓아온 한국갤럽이란 이름을 이처럼 헐값에 팔아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수정한다. 대면면접을 했으니 헐값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법 돈을 벌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돈만 주면 어떤 조사든 수행할 수 있다는 건가. 학술원이 이런 질문을 원하거나 요구했다고 변명할 생각인가. 명색이 국내 최고의 여론조사기관을 자처하면서 어떻게 이런 형편없는 질문지를 허용하고 또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국내 유수 재벌그룹이 지원하는 학술원이란 단체가 굳이 많은 돈을 주겠다는 것까지 거절할 수야 없겠지만, 요즘 조사환경에 걸맞지 않은 대면면접을 통해 거의 한 달 가까이 조사를 수행한 것도 의아하다. 보도자료와 질문지 등을 살펴봐도 왜 대면면접 방식이어야 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전형적인 ‘악화’, 즉 쓰레기에 가까운 여론조사를 고스란히 받아적는 언론은 언제나 그렇듯 대책이 없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백번 천번 얘기해도 전혀 먹히질 않는다. 하기야 일선 기자가 무슨 죄인가 싶기도 하다. 적어도 데스크를 거쳤을 테고, 고위 임원들이 보고 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보도자료에 나와 있는 대로 무조건 베껴 쓰라고 시켰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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