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2022-10-02 17:21

[역사로 보는 선거여론조사] 1987년 대선 ‘여론전쟁의 시작’ ①16년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

16년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 모의 투표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현경보

1987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국민들은 16년 만에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19876월 이전까지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4.13 호헌조치를 단행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국민 기본권 강화, 김대중의 사면복권, 언론자유의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다가오는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지 온 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등이 물망에 올랐다.

6.29 선언 이전만 해도 김대중은 대통령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었지만, 사면복권이 이루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사면복권과 함께 김대중은 국민의 뜻을 물어서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사실상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대권을 앞에 두고 김대중과 김영삼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많은 국민들은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를 기대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합의할 것이라 믿었다.

1987929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외교구락부에서 만나 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 그 뒤로도 동교동과 상도동의 단일화 협상이 이어졌지만 양쪽의 주장은 평행선만 달렸다.

1028일 김영삼이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자, 이틀 뒤인 1030일 김대중도 대통령선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는 끝내 무산됐다.

김영삼은 워싱턴포스트나 타임 등 외신에서 자신의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는 보도에 희망을 걸었다. 김대중은 야권이 분열해도 승리할 수 있다는 ‘4자 필승론을 믿었다.

노태우와 김영삼 후보는 영남에서 서로 표가 갈리고, 자신은 호남의 탄탄한 기반으로 인구가 많은 수도권에서 승부를 벌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후보 모두 대구경북, 부산경남, 전라도, 충청도라는 각자의 지역적 기반에 기대어 대선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동시에 출마한다면 누구도 당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4%YSDJ가 동시에 출마할 경우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후보들의 경쟁은 대규모 동원 유세로 이어졌다.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유세 때마다 100만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언론에서는 여의도 광장에 모인 군중의 규모를 비교하여 후보에 대한 지지도처럼 보도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지지도 여론조사 결과를 언론에 공표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후보들은 경쟁하듯 대규모 장외집회를 열어 자신의 지지세를 과시하려고 애썼다.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도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국민의 73%가 원했지만 법이 허용하지 않던 시대였다.  유권자들은 대선후보의 지지도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알 수 없었다.

 

모의 투표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대학가, 직장, 또는 동창회, 향우회 등 온갖 모임에서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출마 예상자들에 대한 모의투표 또는 인기투표가 성행했다.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았던 시절에는 구경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선거법 제48조는 후보자에 대한 모의투표, 인기투표를 금지하고 있었다. 즉 대통령선거법은 누구든지 선거에 관하여 당선 또는 낙선을 예상하는 인기투표나 모의투표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3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15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대학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대통령선거 모의투표를 하다가 이를 주도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법이었다. 검찰에서도 관련 금지규정이 문제 있다고 판단했는지 흥밋거리로 한 행위를 형사처벌까지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로 선거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던 대학생들을 석방했다.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모의투표나 인기투표를 포함한 여론조사를 사실상 허용하고 있었다.

정당이나 언론사들은 여론조사기관이나 대학 연구소 등에 의뢰하여 대통령선거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일반 국민들은 몰랐지만, 대선후보 측이나 정당에서는 은밀하게 여론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에 노태우 후보 측에서는 여론조사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공공연히 얘기할 정도로 여론조사를 폭넓게 활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선자를 예상하게 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까지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계속)

  1987년 대선 '여론전쟁의 시작'   선거예측신화를 쓴 박무익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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