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2022-10-09 16:52

[역사로 보는 선거여론조사] 1992년 대선 ‘YS와 DJ 숙명의 대결’ ① 1992년은 선거의 해

1992년은 말 그대로 ‘선거의 해’였다. 3월에 국회의원선거, 6월 기초 및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그리고 12월에는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권은 3·24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여 어떻게 하면 연말 대선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총선 민심은 대권 향배의 주도권을 결정할 것이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는 대선의 득표 기반이 되기 때문에 어느 한 선거에서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해 들어…

현경보

1992년은 말 그대로 ‘선거의 해’였다. 3월에 국회의원선거, 6월 기초 및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그리고 12월에는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권은 3·24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여 어떻게 하면 연말 대선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총선 민심은 대권 향배의 주도권을 결정할 것이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는 대선의 득표 기반이 되기 때문에 어느 한 선거에서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해 들어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정치권에 대한 민심은 싸늘했다. 집권 마지막 해 노태우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대로 떨어진지 이미 오래됐다. 

정당에 대한 지지도 또한 여야 가릴 것 없이 겨우 10%대 수준을 유지했다. 국민의 60%가 새로운 정당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은 물론 야당 통합으로 생겨난 김대중의 민주당에 대해서도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민심의 이반을 재빠르게 알아차린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연세대 교수 출신 김동길 목사와 함께 총선을 앞두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정치에 입문했다. 

1990년 1월 22일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합당 발표
1990년 1월 22일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합당 발표
1991년 9월 10일 신민당과 민주당 합당을 통해 통합야당인 민주당 창당
1991년 9월 10일 신민당과 민주당 합당을 통해 통합야당인 민주당 창당
  1992년 2월 8일 현대 정주영 회장 통일국민당 창당
  1992년 2월 8일 현대 정주영 회장 통일국민당 창당

3월 24일 14대 총선은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의 3당 대결 구도로 치러지게 됐다. 신정치개혁당도 있었지만 박찬종의 1인 정당이나 다름없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민자당은 지금의 지지율은 저조했지만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200석이 넘는 거대 여당이었다. 대구경북, 부산경남, 충청 지역의 탄탄한 지역기반으로 다가오는 총선에서 과반 이상의 의석 확보는 쉬워 보였다. 전체 의석수 299석의 60%인 180석까지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앞섰다.

반면, 제1야당인 민주당은 개헌저지선 100석 확보가 목표였다. 3당 합당의 토대가 된 내각제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한 의석수였다.

새롭게 출범한 통일국민당은 YS, DJ, JP 등 3김 정치에 대한 반감이 큰 대구경북 지역과 정주영 회장의 고향인 강원 지역을 집중 공략하여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한 의석을 차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여론을 알아야 승리한다

정치권에서는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을 치르며 여론조사가 선거전략의 핵심으로 자리를 굳혔다.

1992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별로 판세분석 여론조사가 성행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심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14대 총선은 그야말로 여론조사 전쟁을 방불케 했다. 민자당의 총선 판세분석은 90% 이상을 여론조사에 의존했다. 여기에 관계 기관의 정보 보고와 현지실사 보고를 참고로 삼았다.

직전 13대 총선 때 민정당이 과반 이상 의석을 얻어 여대야소 정국이 될 것이라는 관계 기관의 정보 보고를 믿었다가 망신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여론조사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다.

민자당은 자체 여론조사기관인 한국사회개발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를 신뢰했다. 과거 대선과 총선에서 정확한 결과를 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개발연구소 외에도 여러 여론조사기관들과 함께 여론조사에 기반을 둔 선거전략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주로 당 내부의 기획실 전화여론조사팀과 조직국 현지실사팀 등이 판세분석을 담당했다. 기획실 전화여론조사팀에서 매일 선거구당 수백 명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직국 현지실사팀을 통해 서는 지역 언론자료 분석이나 경찰정보 등을 취합하여 민심의 동향을 추가로 파악했다. 외부 여론조사기관에 여론조사를 맡기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당인 민자당만큼 여론조사를 체계적으로 실시하지는 못했다. 

통일국민당은 정주영 회장의 재력을 무기로 민간 여론조사기관과 계약하여 민자당에 버금가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밖에 현대계열 광고회사인 금강기획을 통해 여론조사를 실시하거나, 현대계열사를 통해 지역의 여론동향을 수집하고 분석했다.

정치권에서는 지속적인 여론조사로 전국 선거구별 당선자의 윤곽을 파악하고 예상 의석수 등을 분석할 수 있었지만, 유권자인 국민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구에 어떤 후보가 유리하고 불리한지 파악할 수 있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후보지지도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하거나 보도하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언론사들도 독자나 시청자를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선거 판세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정당과 여론조사를 수행하는 여론조사기관들 뿐이었다. 언론에서도 선거 상황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각 정당의 판세분석 주장을 취재하거나 선거 현장의 여론이나 경찰 정보 등을 취합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1992년 총선에서 여론조사기관들의 인기가 치솟았다. 1988년 총선 때만 해도 여론조사기관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았는데, 1992년 총선 과정에서는 각 정당과 후보들이 선거전략을 위한 핵심자료로 여론조사를 활용했기 때문에 여론조사기관들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1988년 총선에서 여론조사는 민정당 등 일부 정당의 전유물이었지만, 1992년 총선에서는 선거 기간에만 수십억 원 규모의 여론조사 시장이 형성됐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여론조사가 선거의 필수 요소가 되면서, 이제 여론조사 없는 선거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관련 태그:
공유하기: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