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지코(ZICO)가 발표한 '아무노래'는 근래 최고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힙합 트랙입니다. 연예인을 포함해 많은 이들에게 챌린지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히트곡이죠. 쉽고 반복적 가사와 멜로디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아무 노래 아무 노래 아무 노래나 틀어봐~” “아무 노래나 일단 틀어.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아무렇게나 춤춰.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아무 생각 하기 싫어 아무개로 살래 잠시~"

국내 언론이 윤 대통령 지지율을 보도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노래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여론조사에 나타난 의미없는 수치의 변화들을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간주해 '아무 이유'나 가져와 지지율 상승 또는 하락 요인이라고 그럴 듯하게 스토리를 만드는 '아무렇게나 이유를 끼워 맞추는 보도'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가령, “해외 순방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하락했다”거나 “도어스테핑을 중단했음에도 지지율이 상승했다”는 식입니다. 여론조사 결과 수치만 있으면 정 반대의 이유도 끼워 맞출 수가 있습니다.
대통령 해외 순방과 도어스테핑 중단은 지지율 하락 요인일까요, 상승 요인일까요?
국내 '아무 언론'에 따르면, 그게 어떤 이유든 지지율이 내리면 하락 요인이고, 지지율이 오르면 상승 요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후 해석에 기초해 '아무노래' 스타일의 기사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가령,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해외 순방 성과 때문에 지지율이 상승했다거나, 도어스테핑에 불만을 가졌던 중도층이 지지 쪽으로 선회했다는 식으로요.
설마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란 유행이 '아무 언론'에게까지 퍼진 건 아니겠죠. 필요 이상의 일을 하지 않겠다는 MZ세대 사고나 의식 말입니다.
동일 혹은 비슷한 주제에 대한 과거 정부 때의 여론조사 결과들을 찾아보고 비교해본다면 지지율 상승이나 하락 요인을 상당히 선별할 수 있고 비교 분석도 가능할텐데…이런 식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는 기자를 한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군요.
언제부터인가 신형철이란 문학평론가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몰락의 에티카’(2008)란 평론집에서 은희경의 소설을 비평하며, “면도칼도 못 되는 소설들의 중구난방 속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묵직한 통증에 경의를 표한다”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더군요.
"그녀의 소설은 칼이 아닌 척하는 칼이어서 베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깊이 베이게 될 것이다. 쉽게 알아보기 힘든 어떤 힘이 밀고들어와, 조용히 빠져 나가고, 마침내 피 흐를 때, 비로소 당신은 그것이 칼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여론조사를 보도하는 기자들에게 은희경처럼, “칼이 아닌 척하는 칼이어서 베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깊이 베이게" 하는 '예리한 칼잡이'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허황된 생각일까요?
여론조사 보도를 보며 면도날에 살짝 베이는 가벼운 통증이라도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