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4대 대선에서도 여론조사가 선거전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각 당의 후보 진영에서는 여론조사를 통해 지지율 및 지지 기반의 변화를 면밀히 체크해서 선거전략 수립에 활용했다.
민자당의 여론 수집 기능은 중앙조사연구소와 사회개발연구소 및 홍보대책위 산하의 별도 여론조사팀으로 다원화되어 있었다. 이와 별도로 한국갤럽 등에 용역을 주기도 했다.
민주당은 선거대책본부 산하의 기획실 주관 하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또 DJ의 처조카이자 통계전문가인 이영작 박사와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여론조사를 적절하게 유세 전략에 활용했다.
통일국민당은 전문 여론조사기관에 조사를 의뢰하는 한편 현대경제사회연구소가 매주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여론조사 결과 자료를 선거전에 활용했다.
여론조사를 활용한 신경전도 치열했다. 선거를 한 달 남기고 정주영 후보는 현대경제사회연구소에서 조사한 공정한 여론조사 결과라며 “내가 23%이고, 김영삼 씨가 19%, 김대중 씨가 18%로 나왔다”고 주장하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민자당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8% 앞서고 있고, 정주영보다는 15% 앞선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민주당은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격차가 2~3% 내외로 줄어들었다며 서로가 자신의 여론조사 결과가 정확하다고 강조했다.
각 당에서 주장하는 여론조사 결과는 객관적 신뢰도에 대한 시비가 많았지만, 후보 진영에서는 자체 조사나 외부조사기관에서 유리한 조사 결과가 나오면 언론에 흘려서 선거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전략을 수시로 사용했다.
이런 와중에 통일국민당에서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KBS의 여론조사 결과 정주영 후보가 28%, 김영삼 후보가 24%, 김대중 후보가 21%”로 정 후보가 지지율 1위라고 발표했지만, KBS 측에서는 그런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없다고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1992년 12월 11일 부산 기관장 모임을 했던 부산 남구 초원복국에서 도청 사건이 벌어지자 이후 경찰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news/photo/202212/670_657_5927.jpg)
대통령 선거 일주일 앞두고 ‘초원복집 사건’이 터졌다. 12월 11일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부산에 내려가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지검장 등 주요 기관장들을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복어 요리집인 '초원복국'에 초청하여 “우리가 남이가~”, “부산, 경남, 경북까지만 요렇게 단결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등의 발언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이다.
정주영 후보 측 선거운동원이 초원복국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녹음기에 이들의 대화 내용이 녹음돼 언론에 폭로되면서, 공권력을 동원한 지역감정 조장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주요 언론들이 이 사건을 ‘공권력의 선거 개입’이나 ‘지역감정 조장’보다는 ‘불법도청’에 초점을 맞춰 보도함으로써 김영삼 후보가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는 보도가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결국 초원복집 사건은 영남 민심을 결집시킴으로써 김영삼 후보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선거 막바지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볼 때 초원복집 사건이 대선결과에 미친 영향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SBS-미디어리서치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12월 이후 YS가 26~29% 지지율로 19~22%를 얻은 DJ를 단순 지지도에서 7~8%포인트 차로 줄곧 리드하고 있었다. 한편, 정주영과 박찬종은 10% 전후의 지지율로 3, 4위 각축을 벌였다.
하지만 대선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부동층이 여전히 30%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대선을 나흘 앞두고 이종찬 새한국당 후보가 출마 선언 한 달 만에 후보직을 사퇴하고 정주영 후보의 국민당에 입당했다. 당시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종찬 후보의 지지율은 고작 3% 수준에 불과했지만, 국민당은 대선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며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에, 이 후보의 영입을 막판 카드로 공을 들여왔던 민주당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로만 본다면 국민당의 이종찬 영입 효과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종찬 후보가 국민당에 가담했지만 정주영 후보의 지지율에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세 마지막 날인 12월 17일. 정주영 후보가 유세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주영 후보 근소한 차로 당선 확실! 정주영 32.5%, 김대중 31%, 김영삼 30%, 박찬종 5%”라고 쓰인 쪽지를 이종찬에게 보여주었다.
어디서 나온 자료냐고 물어보니, 미 중앙정보국 CIA에서 오늘 오전에 조사한 것인데 아까 유세장에서 극비리에 받았다고 해서 누군가 ‘정보장사’를 했다고 직감했다고 이종찬은 회고했다. (“정주영, 1.5%P 차이로 내가 당선…CIA 자료랍니다”, 동아일보, 2015년 3월 28일자 참조)
한국갤럽의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선거 막바지 여러 돌발변수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후보의 지지율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1992년 대선 결과 정주영은 YS와 DJ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YS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정주영은 동생 정세영을 김영삼 당선자에게 보내 현대그룹의 정치 참여를 사죄하는 일화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