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낸드플래시 손자회사 솔리다임의 미국 증시 상장을 접었다. 상장 추진 사실이 알려진 지 79일 만이다. 주주 반발과 금융당국의 ‘중복상장’ 압박에 반도체 주가 급락까지 겹치자 결국 발을 뺀 것으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는 23일 개장 전 공시에서 “해외 종속회사인 솔리다임은 생산능력 확대 및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다양한 자금조달 방안을 검토해 왔으나, 자본시장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상장 전 투자유치(프리IPO) 및 기업공개(IPO)에 대한 검토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최근 자본시장 여건과 주가 흐름에 비춰 IPO가 회사와 기존 주주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인지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솔리다임은 SK하이닉스가 2020년 약 11조9000억원(90억 달러)에 인수 계약을 맺은 인텔의 낸드·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사업을 토대로 2021년 출범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인이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중간지주사 AI컴퍼니를 통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전체 기업가치에서 솔리다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12.9% 수준으로 평가된다.
상장설이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 8월 5일이다. 이후 외신을 중심으로 이르면 2027년 미국 증시에 입성해 기업가치 최대 약 200조원(1500억 달러), 조달 규모 약 13조~20조원(100억~150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성사되면 미국 반도체 기업 사상 최대 IPO가 될 것이라는 평가였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주관사로 선정됐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시장 반응은 싸늘했다. SK하이닉스 주가는 8월 5일 166만8000원에서 이튿날 149만5000원으로 하루 새 10% 넘게 빠졌다. ‘SK㈜→SK스퀘어→SK하이닉스→AI컴퍼니→솔리다임’으로 이어지는 다층 지배구조에서 손자회사가 따로 상장하면 모회사 가치가 할인되고, 신주 발행으로 기존 주주의 간접 지분이 희석된다는 ‘중복상장’ 논란이 번졌다.
금융당국도 제동을 걸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9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중복상장에 저촉된다는 판단은 금융위도, 금감원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도 22일 국감에서 솔리다임의 미국 상장이 중복상장 가이드라인 적용 대상이라고 밝혔다. SK스퀘어와 SK하이닉스 모두 모회사로서 주주 보호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도 못 박았다. 지난 8월 3일 시행된 이 가이드라인은 해외 상장에도 적용되며, 모회사 이사회는 주주 영향 평가, 주주 보호 방안 마련, 주주 소통, 이사회 의결, 공시 등 5대 의무를 지켜야 한다.
얼어붙은 반도체 투자심리도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낸드 업체 샌디스크 주가는 지난 6월 고점보다 40% 넘게 떨어졌고, SK하이닉스 주가도 9월 말 이후 30% 넘게 하락했다. 동종 업체 몸값이 크게 깎인 상황에서 솔리다임 역시 기대만큼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규제 강화가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회사 관계자는 “IPO의 경제적 효과나 솔리다임의 성장 필요성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라며 “현재 시장 여건을 감안해 주주가치 측면에서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로선 상장을 다시 검토할 계획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주가는 장 초반 크게 출렁였다. 전날 미국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가 6.72% 급락한 여파로 SK하이닉스는 장중 117만1000원까지 밀려 낙폭이 4%를 넘었다. 이후 낙폭을 만회해 한때 123만7000원까지 오르며 상승 전환하기도 했다. 오전 11시 33분 현재 주가는 122만2000원으로 전 거래일(122만3000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증권가에서는 중복상장 할인과 지분 희석 우려를 덜어 주주가치 방어 효과는 있지만, 외부 자본 조달 길이 막힌 만큼 SK하이닉스가 짊어질 투자 부담은 커질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남은 과제는 투자 재원 마련이다. 솔리다임은 본사가 미국에 있지만 생산시설은 중국 다롄에만 있다. 미국 빅테크와 협력을 강화하고 현지 공급망을 넓히기 위해 미국 동부에 첫 공장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 한 곳을 짓는 데 수십조원이 드는 만큼 SK하이닉스는 직접 투자를 포함한 다양한 조달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다. 회사는 투자 시기와 규모, 재원 조달 방식을 따져 솔리다임의 성장과 기존 주주 이익을 함께 높일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오는 28일 3분기 실적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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