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비즈

라이프2026-09-23
[지금, 다시 읽는 책]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다…‘세계 수어의 날’ 다시 읽는 다른 언어의 세계
  • 23일 세계 수어의 날…세계농인연맹 창립 75주년·장애인권리협약 채택 20주년
  • 수어는 몸짓 아닌 하나의 언어…농인·코다의 삶으로 다시 보는 ‘소통’의 의미
  • 소설·그래픽노블·에세이부터 수어 일력까지…눈과 손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세계
세상의 모든 언어가 소리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손의 움직임과 얼굴 표정, 몸의 방향과 시선 역시 어휘와 문법이 되고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수어는 음성언어를 손동작으로 옮긴 보조수단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법과 표현체계를 가진 언어다. (이미지=AI로 생성)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고 하면 우리는 먼저 목소리를 떠올린다.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 다시 말로 답한다. 오랫동안 사회의 학교와 병원, 방송, 공공서비스도 이런 방식의 소통을 ‘기본값’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언어가 소리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손의 움직임과 얼굴 표정, 몸의 방향과 시선 역시 어휘와 문법이 되고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수어는 음성언어를 손동작으로 옮긴 보조수단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법과 표현체계를 가진 언어다.

매년 9월 23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수어의 날(International Day of Sign Languages)’이다. 1951년 9월 23일 세계농인연맹(World Federation of the Deaf·WFD)이 창립된 날을 기념해 제정됐으며 2018년 처음 공식 기념됐다. 올해는 세계농인연맹 창립 75주년과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CRPD) 채택 20주년이 겹친다. 2026년 주제도 ‘농인의 인권을 선언하다(Declaring Deaf People’s Human Rights)’다.

그래서 세계 수어의 날에 책을 펼치는 일은 ‘듣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엿보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는지, 청인 중심 사회에서 농인이 경험하는 장벽은 어디에서 생기는지, 농인과 청인의 세계를 오가는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번 주에는 농인학교를 무대로 한 소설에서 코다(CODA)의 기록, 자전적 그래픽노블과 농인의 목소리를 직접 담은 책까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언어의 세계’를 보여주는 책들을 다시 읽는다.

듣는 법’보다 먼저 필요한 언어

-트루 비즈 (사라 노빅, 위즈덤하우스, 2025)

찰리는 농인이지만 수어에 익숙하지 않다. 청인 가족 안에서 자라며 인공와우와 구화를 중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찰리가 농인학교 리버밸리에 들어가면서 자신과 같은 농인들이 수어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세계를 처음 마주한다.

사라 노빅의 장편소설 ‘트루 비즈’는 수어 교육과 인공와우, 농인학교, 농인 공동체를 둘러싼 여러 갈등을 청소년들의 학교생활에 녹여낸 작품이다. 저자 역시 농인이다. 국내에는 지난해 위즈덤하우스에서 번역 출간됐다. ‘트루 비즈(True Biz)’라는 제목도 미국 수어에서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반드시 같은 문제는 아니라는 데 있다. 인공와우와 음성언어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수어를 배우고 농인 공동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권리 역시 존재한다. 작품 속 학교를 따라가다 보면 장애를 기술로 얼마나 보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어느새 ‘한 사람이 자신의 언어를 선택할 권리를 누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농인과 청인의 두 세계를 오가는 사람들

-코다: 내가 살아가는 두 세계 (이가라시 다이, 타래, 2025)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한다. 이가라시 다이는 농인 부모 아래에서 성장한 자신의 경험을 30편의 글로 풀어낸다. 집에서는 수어가 자연스럽지만 집 밖으로 나가면 음성언어가 기준이 된다. 하나의 가족 안에 두 언어와 두 문화가 존재하는 셈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를 대신해 통역해야 했고, 성장하면서 농인사회와 청인사회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혼란도 경험했다. 한때 멀어졌던 수어를 다시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책의 중요한 축이다.

책을 읽다 보면 코다를 단순히 ‘농인 부모를 돕는 청인 자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언어를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은 두 문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코다입니다 (이길보라·이현화·황지성, 교양인, 2019)

같은 코다의 삶을 한국 사회로 옮기면 풍경은 또 달라진다. ‘우리는 코다입니다’는 세 명의 저자가 농인 부모와 함께 성장하면서 경험한 가족과 언어, 정체성의 문제를 직접 이야기한다. 이 책은 2019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이기도 하다.

수어로 대화하는 가정과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사회 사이에서 자란 아이들은 때로 어린 나이에 부모의 통역자가 된다. 병원이나 은행, 관공서처럼 전문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그 역할이 자녀에게 돌아가곤 한다.

중요한 것은 코다를 ‘두 세계 사이에서 고생하는 사람’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 된다. 책은 농인과 청인을 가르는 경계뿐 아니라 우리가 너무 쉽게 ‘정상적인 의사소통’이라고 부르는 기준 자체를 되묻게 한다.

보청기는 결핍일까, 슈퍼 파워일까

-엘 데포: 슈퍼 파워 에디션 (시시 벨, 밝은미래, 2020)

시시 벨은 네 살 무렵 질병으로 청력을 잃었다. ‘엘 데포’는 그 경험을 토끼 캐릭터 ‘시시’에게 옮겨놓은 자전적 그래픽노블이다. 커다란 보청기를 사용하게 된 시시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다른 아이들의 시선과 자신의 차이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시시는 자신이 사용하는 보청기가 교사의 목소리를 먼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시시는 이를 자신만의 ‘슈퍼 파워’라고 상상하고 ‘엘 데포’라는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낸다.

작품은 청각장애를 단순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만 다루지 않는다. 학교생활과 친구 관계, 첫사랑, 외로움과 자신감처럼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겪는 감정 사이에 청각장애 경험을 자연스럽게 놓는다. ‘엘 데포’는 2015년 미국도서관협회(ALA)의 뉴베리 아너에 선정됐으며, 그래픽노블로서는 처음 이 영예를 얻은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20년 개정증보판인 ‘슈퍼 파워 에디션’이 출간됐다.

시시가 결국 발견하는 것은 남들과 똑같아지는 방법이 아니다. 자신에게 있는 차이를 숨기지 않고 친구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어린이를 위한 그래픽노블이지만 성인 독자에게도 ‘다름’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

‘농인의 삶’은 하나가 아니다

-소리를 보는 사람들 (요한나 크라프, 라온누리, 2024)

소설과 자전적 이야기를 넘어 실제 농인들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 듣고 싶다면 ‘소리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요한나 크라프가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만난 농인 8명과 인공와우를 사용한 난청인 1명, 수어통역사 1명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국내에는 2024년 12월 번역 출간됐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제각각이다. 농인 가족에서 성장한 사람도 있고 청인 가족 안에서 자란 사람도 있다. 교육 과정과 직업, 가족 관계, 인공와우에 대한 생각 역시 서로 다르다. ‘농인은 이렇게 살아간다’고 한 문장으로 묶을 수 없는 이유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음성언어가 중심인 사회에서 당연하게 설계된 일상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학교 수업과 의료기관, 직장 회의처럼 정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어통역과 정보 접근권은 편의를 넘어 생활의 기본 조건이 된다.

다섯 권의 책을 차례로 읽으면 ‘듣지 못한다’는 하나의 조건으로 묶였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얼굴을 갖기 시작한다. 농인학교 학생과 농인 부모를 둔 아이, 보청기를 사용하는 어린이와 수어통역사를 필요로 하는 성인의 삶은 모두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누군가 대신 정해준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관계를 맺을 권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세계 수어의 날에 책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어를 몇 가지 손동작으로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세계를 살아가는지 바라보는 것. 다른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이 존재하는 방식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주의 신간

유손생의 수어 일력 365 (유슬기, 페이지2북스, 2026)

이번 세계 수어의 날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나온 책은 지난 9일 출간된 ‘유손생의 수어 일력 365’다. 저자 유슬기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코다이자 수어통역사로, 온라인에서 ‘유손생’이라는 이름으로 수어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책은 제목 그대로 하루에 하나씩 수어를 익힐 수 있도록 구성됐다. 384쪽에 걸쳐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담았고, 모든 문장에는 실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QR 영상이 제공된다. 종이에 그려진 손 모양만 보고 동작을 짐작하는 데서 생기는 한계를 보완한 방식이다.

하루 한 단어나 한 문장을 배운다고 당장 수어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첫 단계는 그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사용해 보는 데서 시작한다.

손으로 말하고 눈으로 듣는 세계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 이미 같은 사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또 하나의 언어다. 9월 23일, 책 한 권을 펼치는 일은 그 언어와 사람들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황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