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2026-08-06 07:58

[지금, 다시 읽는 책] 가을은 달력에서 먼저 온다…입추에 다시 읽는 계절의 책들

입추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계절의 변화를 먼저 감지하는 날에 가깝다. 여름의 끝을 기억하는 소설, 자연의 속도로 시간을 읽는 산문,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까지. 가을의 문턱에서 다시 펼쳐볼 여섯 권을 골랐다.

황주영 기자
  • 폭염은 여전해도 절기는 이미 가을의 문턱
  • 늦여름의 빛부터 인생의 황혼까지 이어지는 여섯 권
  • 지나가는 계절을 붙잡고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는 독서
달력에는 어느새 ‘입추’라는 두 글자가 놓였다. 실제 날씨보다 달력이 먼저 가을을 데려온 셈이다. (이미지=AI로 생성)

햇볕은 여전히 뜨겁고 밤에는 에어컨이 쉬지 않고 돌아간다. 거리의 옷차림도, 휴가지의 풍경도 아직 한여름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달력에는 어느새 ‘입추’라는 두 글자가 놓였다. 실제 날씨보다 달력이 먼저 가을을 데려온 셈이다.

올해 입추는 8월 7일이다. 입추는 대서와 처서 사이에 드는 24절기의 열세 번째 절기로, 태양이 황경 135도에 이르는 때를 가리킨다. 이름에는 ‘가을에 들어선다’는 뜻이 담겼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도 입추는 완성된 가을을 맞는 날이라기보다 김장용 무와 배추를 심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생활의 기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입추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계절의 변화를 먼저 감지하는 날에 가깝다. 여름의 끝을 기억하는 소설, 자연의 속도로 시간을 읽는 산문,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까지. 가을의 문턱에서 다시 펼쳐볼 여섯 권을 골랐다.

여름이 남아 있는 동안 가을은 시작된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비채, 2016)

계절은 달력이 넘어간다고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여름은 한 장소의 빛과 냄새에 남고, 어떤 시간은 그곳을 떠난 사람의 기억 속에서 뒤늦게 완성된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이처럼 한 계절이 사람과 공간에 머무는 방식을 섬세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신입 건축가 사카니시는 노건축가 무라이 슌스케가 이끄는 설계사무소에 들어간다. 이들은 여름 동안 산속 별장에 머물며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공모를 준비한다. 사무소를 여는 연필 깎는 소리와 숲 냄새를 머금은 바람, 갓 구운 스콘과 목재의 질감이 이어지는 가운데 건축가들은 건물이 주변 자연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소설은 극적인 사건을 빠르게 밀어붙이기보다 사람이 일하고 배우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천천히 쌓아 올린다. 건축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과 주변 풍경을 위한 그릇이 된다. 젊은 건축가가 스승의 태도를 지켜보며 성장하는 과정 역시 눈에 띄는 변화보다 오랜 관찰과 반복을 통해 이뤄진다.

2016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 작품은 2026년 새로운 디자인의 라이트에디션으로 다시 출간됐다. 입추가 여름을 단숨에 밀어내는 날이 아니듯, 이 소설의 여름도 끝났다는 선언 뒤에 오래 남는다. 계절은 지나가지만 그 계절에 배운 삶의 태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우는 작품이다.

-‘늦여름’ 1·2(아달베르트 슈티프터, 문학동네, 2011)

여름이 끝나갈 무렵 잠시 되돌아오는 따뜻한 날들을 ‘늦여름’이라 부른다.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장편소설 ‘늦여름’에서 이 말은 자연의 한때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인생의 경험을 통해 성숙해 가는 시간을 뜻한다.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진 청년 하인리히는 여행을 하던 중 폭풍을 피해 한 저택을 찾는다. 그러나 저택의 주인 리자흐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의 판단이 자연을 오래 관찰한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인리히는 이후 저택을 거듭 방문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리자흐의 집에서는 정원과 농장, 가구와 그림, 책과 조각이 무질서하게 늘어서지 않는다. 자연과 예술, 노동과 생활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하인리히는 이곳에서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사물을 오래 바라보는 법과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다.

두 권을 합쳐 900쪽에 가까운 긴 소설이며 전개 역시 느리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림이 작품의 중심이다. 사람의 성장도 계절의 변화처럼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는다. 정밀한 자연 묘사와 인간 내면의 발전을 함께 그린 ‘늦여름’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더불어 19세기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성장소설로 평가받는다. 폭염 속에서 이미 다음 계절을 알리는 입추처럼, 성숙의 조짐은 삶이 크게 달라지기 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력 대신 풍경으로 계절을 읽는 사람들

-‘자전거여행’ 1·2(김훈, 문학동네, 2014)

계절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은 달력보다 몸일지 모른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오르다 보면 맞바람의 온도가 달라지고, 강가의 풀빛과 논의 냄새가 변한다. 자동차 안에서는 순식간에 지나갔을 풍경도 페달을 밟는 사람 앞에서는 속도를 늦추며 모습을 드러낸다.

김훈의 ‘자전거여행’은 저자가 전국의 산과 강, 갯벌과 포구를 자전거로 지나며 쓴 기행산문이다. 김포평야와 남양만, 섬진강과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길 위에서 자연의 생태와 지역의 역사,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노동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난다.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 풍경이 만들어지기까지 쌓인 지리적 시간과 사람의 삶을 함께 들여다본다.

자전거는 여행자를 자연의 바깥에 세워두지 않는다. 오르막의 경사와 바람의 저항, 땀과 갈증을 온몸으로 통과하게 한다. 그렇게 몸이 풍경에 개입하는 순간 계절은 배경이 아니라 직접 겪는 현실이 된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 강물이 흐르는 방향과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각 지역 사람들의 생업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드러난다.

입추에 이 책을 다시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절의 변화는 기온계에 표시되는 숫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해가 지는 시간이 조금 빨라지고, 저녁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길가 식물의 색이 미세하게 바뀌는 순간을 몸으로 알아차릴 때 비로소 가을은 시작된다.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은행나무, 2021)

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에 직접 오두막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약 2년 2개월 동안 자연의 사계절을 통과하며 자신이 먹고 자고 일하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찰했다. ‘월든’은 그 생활을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와 노동, 자연과 문명에 관해 쓴 기록이다.

소로의 실험은 세상을 등지고 혼자 살아남으려는 도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가 당연하다고 요구하는 소비와 노동의 방식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검토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작은 집을 짓는 비용부터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과정까지 기록하며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에 내주는 삶이 정말 풍요로운지 묻는다.

월든 호수의 얼음이 녹고 숲의 색이 바뀌는 과정은 인간이 정한 일정과 무관하게 움직인다. 자연의 시간 앞에서 인간의 조급함은 작아진다. 가을은 여름을 실패하게 만드는 계절이 아니며, 겨울 역시 생명의 끝이 아니다. 계절마다 해야 할 일이 다르고, 멈춰 있는 듯한 시간에도 다음 변화가 준비된다.

입추는 새로운 계절용 물건을 장만하기 전에 하반기의 삶에서 무엇을 덜어낼지 생각해 볼 기회이기도 하다. 소로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계절을 맞는다는 것은 옷장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가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를 다시 살피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가을은 끝이 아니라 돌아볼 시간이 시작됐다는 뜻

-‘가을’(앨리 스미스, 민음사, 2019)

앨리 스미스의 ‘가을’은 단풍과 낙엽을 아름답게 그려낸 전통적인 계절소설과 거리가 있다. 작품이 바라보는 가을은 익숙했던 질서가 흔들리고 사회의 균열이 드러나는 시기다. 자연의 계절은 순환하지만 인간 사회는 이전과 같은 자리로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소설의 중심에는 서른두 살의 엘리자베스와 101세 노인 대니얼이 있다. 두 사람은 어린아이와 노인으로 처음 만나 세대와 나이의 차이를 넘어선 우정을 이어온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대니얼 곁에서 엘리자베스는 그와 나눴던 대화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린다. 이들의 기억 사이에는 예술과 사랑, 노화와 죽음, 영국 사회의 변화가 겹쳐진다.

‘가을’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국민투표 이후의 사회를 빠르게 소설에 담아낸 작품이다. 국경과 정체성, 외국인 혐오와 정치적 분열을 다루면서도 작품은 냉소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사람이 오랫동안 쌓아 온 관계와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앨리 스미스의 ‘계절 4부작’ 첫 권으로,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동시에 잎을 내려놓는 계절이다. ‘가을’은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분열의 시기에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관계와 태도가 무엇인지 묻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회 역시 조금씩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대의 계절소설이다.

-‘남아 있는 나날’(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2021)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인생의 가을에 도착한 한 남자가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소설이다. 영국 귀족 저택 달링턴 홀에서 평생 집사로 살아온 스티븐스는 새 주인의 권유로 며칠간의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지는 과거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이 사는 곳이다.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개인의 감정과 판단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맡은 업무를 계속했고, 켄턴 양에게 품었던 감정도 직업적 품위라는 이름 아래 외면했다. 자신이 섬긴 달링턴 경의 정치적 판단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조차 충성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기억을 하나씩 꺼내 놓을수록 그가 지켜왔다고 믿은 품위의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충성은 때로 책임을 회피하는 명분이 됐고, 절제는 사랑을 잃게 만든 침묵이 됐다. 스티븐스는 너무 늦은 시점에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깨닫는다.

1989년 부커상을 받은 이 작품이 허무와 후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나간 낮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저녁이다. 계절로 치면 스티븐스의 삶은 분명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그에게도 다른 사람과 농담을 나누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볼 시간은 남아 있다. 가을을 쇠락이 아니라 지난 선택을 돌아보고 남은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계절로 읽게 하는 작품이다.

입추의 ‘입’은 가을이 완성됐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그 문턱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한낮의 열기는 그대로지만 해는 조금씩 짧아지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는 식물과 바람이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책을 읽는 일도 이와 닮았다. 아직 닥치지 않은 시간을 미리 살아보고, 지나간 계절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의미를 뒤늦게 발견하게 한다. 가을은 선선한 바람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지 않는다. 달력이 먼저 데려온 계절의 문턱에서 책을 펼치는 순간, 보이지 않던 변화는 비로소 문장이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이주의 신간*

성공 신화의 잿더미에서 되살아난 여자들의 이야기 :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박상영, 래빗홀, 2026)

‘대도시의 사랑법’과 ‘1차원이 되고 싶어’ 등을 통해 동시대의 사랑과 관계를 그려온 박상영이 5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2026년 7월 출간된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는 작가가 처음 본격적으로 도전한 미스터리 스릴러다.

평범한 회사원인 재일 한국인 여성 마츠노 하나는 요코하마에서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를 화재로 잃는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 남긴 말은 한국 대기업 총수 윤동주 회장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하나는 기자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건너오고, 어머니와 윤동주 회장, 재벌가를 둘러싼 오랜 비밀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방화 사건의 진실을 좇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면서 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한국 경제사의 변화를 함께 통과한다. 기업의 성장과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욕망, 그 과정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삶, 성공 신화 이면의 담합과 부패가 여러 인물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드러난다.

박상영은 사랑을 낭만적인 구원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 구원이었던 관계가 다른 사람에게는 오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모순을 파고든다. 기존 작품의 날카로운 관계 묘사를 유지하면서도 역사와 재벌 서사, 방화 사건과 복수극을 결합해 작가의 새로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신작이다.

hjy@theopiniontimes.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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