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트렌드2026-07-30
[지금, 다시 읽는 책] 친구는 어떻게 우리를 구하는가…‘우정의 날’ 다시 읽는 관계의 책들
  • 1958년 파라과이 시민운동에서 2011년 유엔 기념일까지
  • 철학·과학·문학이 다시 묻는 ‘좋은 친구’의 조건
  • 위로와 경쟁, 속죄와 기억…우정이 사람을 바꾸는 일곱 장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연락처와 온라인 팔로어는 늘었지만, 삶이 흔들릴 때 선뜻 곁을 내어 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미지=AI로 생성)

매년 7월 30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우정의 날’이다. 이 기념일의 민간 차원의 기원은 1958년 파라과이의 작은 도시 푸에르토 피나스코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의사 라몬 아르테미오 브라초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우정을 기념하는 날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아내와 지인들과 함께 민간단체 ‘세계 우정 십자군’을 조직했다. 같은 해 ‘우정 주간’ 행사가 열린 뒤 7월 30일이 우정을 기리는 날로 자리 잡았고, 이 단체는 우정을 통해 연대와 이해, 화해의 가치를 확산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다만 오늘날의 국제 우정의 날은 이 민간운동이 그대로 유엔 기념일이 된 것이 아니라, 유엔이 별도의 공식 절차와 결의를 거쳐 제정한 날이다.

유엔 총회는 2011년 5월 3일 결의안을 표결 없이 채택하고, 매년 7월 30일을 국제 우정의 날로 기념하기로 했다. 유엔이 말하는 우정은 사적인 친분에만 머물지 않는다. 개인과 공동체, 민족과 국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우정이 평화 활동을 촉진하고 공동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청년들이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고 국제적 이해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키우는 활동에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연락처와 온라인 팔로어는 늘었지만, 삶이 흔들릴 때 선뜻 곁을 내어 줄 사람은 얼마나 될까. 키케로는 우정과 행복한 삶의 관계를 물었고, 로빈 던바는 인간이 친구를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을 과학의 언어로 설명한다. 엘레나 페란테와 헤르만 헤세의 친구들은 서로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질투하게 하고, 경쟁하게 하며, 자기 안에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손원평과 할레드 호세이니, 한강의 소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감정과 잘못, 상처와 기억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국제 우정의 날을 맞아 철학과 문학이 기록한 관계의 여러 얼굴을 다시 펼쳐본다.

친구는 왜 필요한가…오래된 철학과 관계의 과학

‘라일리우스 우정론’ (키케로, 아카넷, 2022)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가 쓴 ‘라일리우스 우정론’은 우정을 삶에 덧붙이는 즐거움이 아니라,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관계로 바라본다. 작품은 라일리우스가 세상을 떠난 친구 스키피오를 회상하며 두 사위에게 우정의 본질과 조건을 들려주는 대화편이다. 키케로는 이 작품을 자신의 평생 친구 아티쿠스에게 헌정했다.

라일리우스에게 친구는 외로움을 달래거나 필요한 도움을 얻기 위해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우정은 상대의 인격과 삶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서로의 의지와 생각을 나누되, 잘못된 선택까지 무조건 옹호해서는 안 된다. 친구를 위해 부당한 일을 하거나 친구에게 부당한 일을 요구하는 순간 우정은 공모로 변한다.

따라서 좋은 친구는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과 다르다. 때로는 듣기 불편한 충고를 건네고, 잘못된 길 앞에서 멈춰 세우며, 다른 사람들이 침묵할 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친구다. 라일리우스가 죽은 스키피오를 추억하는 장면은 우정의 힘이 친구가 곁에 있는 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한 사람과 나눈 판단과 가치, 기억은 그가 떠난 뒤에도 남은 사람의 삶을 이끄는 기준이 된다.

친구가 많다는 것과 외롭지 않다는 것은 다르다

‘프렌즈’ (로빈 던바, 어크로스, 2022)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이 많고 소셜미디어에서 수백 명과 연결돼 있어도, 실제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국의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프렌즈’에서 우리가 왜 친구를 사귀는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는지, 우정은 어떻게 깊어지고 또 멀어지는지를 심리학과 인류학, 신경과학 등의 연구를 통해 설명한다.

우정은 의지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함께 보내는 시간과 반복되는 접촉, 비슷한 관심사와 경험, 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래 만나지 않은 친구가 어느 날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관계가 나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우정도 돌보지 않으면 친밀도가 달라질 수 있다.

던바의 설명은 친구의 숫자를 늘리는 데 익숙해진 디지털 시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온라인 기술은 멀리 있는 사람과 연결되는 일을 쉽게 만들었지만, 연결됐다는 사실만으로 깊은 관계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다.

‘라일리우스 우정론’이 어떤 사람과 우정을 맺고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윤리의 언어로 묻는다면, ‘프렌즈’는 우정이 인간의 삶에서 왜 중요한지를 과학의 언어로 해석한다. 두 책이 가리키는 결론은 닮아 있다. 우정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관계가 아니라, 시간과 관심을 들여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위로보다 질투가 먼저 찾아오는 우정

‘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한길사, 2016)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는 친구를 착하고 다정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난과 폭력이 남아 있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자란 릴라와 레누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인 동시에 평생의 경쟁자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릴라를 바라보며 레누는 동경과 열등감을 함께 느끼고, 레누가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동네 밖으로 나아가는 동안 릴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애정뿐 아니라 질투와 분노, 경쟁과 의존이 뒤섞여 있다. 한 사람의 성취는 다른 사람에게 순수한 기쁨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상대의 재능은 때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를 앞서고 싶은 마음과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두 사람을 움직인다.

친구는 반드시 편안한 존재여야 할까. 어떤 친구는 등을 토닥여주는 대신 나보다 먼저 달려가고, 그 뒷모습을 따라가고 싶게 만든다. 때로는 내가 애써 감춰온 결핍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기도 한다. 페란테는 이런 불편한 감정도 우정의 일부임을 숨기지 않는다.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우정은 완성된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른 환경과 선택, 계층의 변화에 따라 계속 흔들리고 다시 만들어지는 긴 과정이다. 친구가 우리를 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따뜻한 말 때문만이 아니다. 친구의 존재를 통해 지금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도 한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서로 다른 길을 인정하는 것이 우정이라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문학동네, 2024)

중세 독일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는 서로 정반대인 두 사람이 등장한다. 나르치스는 이성과 정신, 종교적 사유와 금욕을 추구한다. 골드문트는 감각과 예술, 사랑과 방랑의 세계로 향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닮지 않았지만, 상대가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본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수도원에 남아 자신과 같은 삶을 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골드문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 그의 본성이 향하는 세계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골드문트 역시 나르치스에게 자신과 같은 자유와 감각의 삶을 강요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우정은 늘 붙어 지내는 관계도 아니다.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뒤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아간다. 그러나 골드문트가 위기에 놓였을 때 나르치스는 다시 손을 내밀고, 방랑하는 삶에서 얻은 경험이 예술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한다. 친구를 구하는 일은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일이라는 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

차이를 줄여야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헤세는 진정한 우정이란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끝까지 견디는 일일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친구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대신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누구인지 잊었을 때,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나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연습

‘아몬드’ (손원평, 창비, 2017)

손원평의 ‘아몬드’는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윤재와, 분노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곤의 만남을 그린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이상적인 친구가 아니다. 처음에는 충돌하고 경계하며,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관계는 이해가 끝난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한 발 다가가고,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조금씩 바라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윤재와 곤은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히지만, 상대를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과 선택을 경험한다.

‘아몬드’가 보여주는 우정의 구원은 누군가가 상처 입은 친구를 완전하게 치유하는 방식과 다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내면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도 경계한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곁에 머무는 일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친구는 내게 부족한 감정을 대신 채워주는 사람이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우게 하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과 무관한 것으로 밀어내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다. ‘아몬드’가 우정을 통해 보여주는 성장은 감정을 얼마나 풍부하게 느끼느냐보다, 타인의 삶을 향해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에 가깝다.

친구를 외면한 기억이 한 사람을 다시 부를 때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현대문학, 2022)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 아미르와 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의 아들 하산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소년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지만, 이들 사이에는 계급과 민족, 종교적 차이가 놓여 있다. 하산은 아미르에게 한결같은 신의를 보이지만, 아미르는 결정적인 순간 친구를 외면한다.

아미르의 침묵과 배신은 어린 시절의 실수로 사라지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뒤에도 죄책감은 그의 내면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자신이 외면했던 친구에게 진 빚을 행동으로 갚을 기회를 맞는다.

이 소설에서 우정은 서로를 즉시 구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다. 친구를 구하지 못한 기억이 남은 사람에게 평생 책임을 묻는 관계다. 아미르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과거를 지우거나 자신을 쉽게 용서하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잘못이 발생했던 자리로 돌아가 대가를 치르고, 이제라도 다른 선택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어떤 우정은 끝난 뒤에야 자신의 무게를 드러낸다. 친구의 부재와 자신이 선택했던 침묵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친구가 우리를 구한다는 말은 친구가 늘 손을 내밀어 준다는 뜻만은 아니다. 한때 외면했던 친구의 기억이 더는 비겁하게 살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우정이 남기는 구원의 방식이다.

친구의 부탁에서 시작된 기억의 동행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문학동네, 2021)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우정을 전면에 내세운 전형적인 관계소설은 아니다. 작품의 중심에는 제주4·3의 기억과 학살의 상처,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온 긴 애도가 놓여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역사 속으로 독자를 이끄는 첫 문은 경하와 인선이라는 두 친구의 관계다.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인선은 경하에게 제주 집에 홀로 남은 새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경하는 폭설이 내리는 제주로 향하고, 친구가 살아온 공간과 인선의 어머니가 간직해 온 기억을 마주한다. 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 주기 위해 시작한 길은 점차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 고통과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향한 여정으로 바뀐다.

경하는 친구의 상처를 대신 치유할 수 없다. 인선과 가족이 겪은 고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친구가 견뎌온 기억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고,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곁에 선다. 우정은 여기서 위로의 언어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는 윤리로 확장된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을 위험에서 꺼내거나 상처를 없애주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들으려 하고, 혼자 짊어진 기억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붙드는 일도 구원의 한 형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이 어떻게 죽은 사람들과 작별하지 않는 기억의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친구는 우리를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실패를 막아주거나 모든 상처를 치유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친구 때문에 질투하고 상처받으며, 자신의 비겁함과 부족함을 마주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좋은 우정은 사람이 자기 안에 갇히지 않도록 한다.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과 삶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친구가 우리를 구한다는 말은 누군가가 매번 손을 내밀어준다는 뜻만은 아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존재가 내가 누구였는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잊지 않게 한다. 우정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흔적을 남기고, 사람이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갈 길을 만든다.

황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