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광

라이프2026-07-09
[지금, 다시 읽는 책] 빗소리에 다시 펼치는 책들… 장마철에 읽는 다섯 편의 문학
  • 축축한 계절, 책 속의 비는 기억과 상처, 위로를 데려온다
  • 황정은부터 손창섭, 서머싯 몸까지, 비를 통과해 인간을 읽는 작품들
  • 비 오는 날의 우산, 전후의 거리, 낯선 섬과 상점, 그리고 비 온 뒤의 침묵
(이미지=AI로 생성)

하루 종일 지루할 만큼 비가 내리는 장마 기간이 이어지고 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 덕분에 옷깃도, 바닥도, 마음 한구석도 축축하게 느껴지는 나날들이다. 그러나 빗길 속에서, 혹은 비 오는 날 카페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다 보면 잊고 지내던 기억들이 조용히 되살아나곤 한다. 빗소리는 부유하는 물방울처럼 오래전 얼굴을 떠오르게 하고, 젖은 거리는 묻어둔 생각에 다시금 감정이 스며들게 한다. 비는 그렇게, 우리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계절의 언어다.

문학 속 비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이에게 비는 상처를 가려주는 장막이고, 어떤 이에게는 견뎌야 할 현실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낯선 세계로 이어지는 문이다. 비를 막으려고 펼친 우산이 뜻밖에 곁을 내어주는 몸짓이 되고, 그치지 않는 폭우가 인간의 위선과 욕망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비가 그친 뒤의 풍경은 지나간 사랑과 삶의 빈자리를 더 선명하게 비춘다.

이번 ‘지금, 다시 읽는 책’에서는 장마철에 어울리는 다섯 권을 골랐다.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손창섭의 ‘비 오는 날’, 서머싯 몸의 ‘비’가 실린 ‘서머싯 몸 단편선 1’, 유영광의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윌리엄 트레버의 ‘비 온 뒤’다. 결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비라는 감각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그 시대의 풍경을 비춘다.

황정은 ‘디디의 우산’_ 우산은 비를 막는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를 혼자 젖게 두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황정은, 창비, 2019)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에서 우산은 제목이 가리키는 사물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비를 피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온전히 혼자 젖게 두지 않겠다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장마철 책장에 올려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디디의 우산’은 비 내리는 풍경을 낭만으로 소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를 맞으며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서로에게 무엇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묻는 소설에 가깝다.

이 책은 연작의 성격을 지닌 중편 두 편을 묶었다. 시대상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서로 공명하는 이 연작은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6~2017년 촛불혁명이라는 사회적 격변을 배경으로 일상 속 ‘혁명’의 의미를 되짚는다. 작품은 2019년 제34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이 지나간 뒤에도 삶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황정은의 문장은 크게 외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남겨진 사람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 그럼에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시간을 소설은 조용히 따라간다. 그래서 이 책의 우산은 보호막이라기보다 관계의 은유에 가깝다. 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어도, 잠시 함께 맞아줄 수는 있다는 감각이다.

장마철에 ‘디디의 우산’을 다시 펴는 일은 비를 피하는 법을 찾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피할 수 없는 비 앞에서,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돌볼 수 있는지를 묻는 일에 가깝다. 축축한 계절이 이따금 불편한 감정을 데려온다 해도, 이 책은 그 감정을 억지로 닦아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젖은 마음 그대로, 누군가의 곁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나직이 말한다.

손창섭 ‘비 오는 날’_ 낭만이 걷힌 자리, 전후의 폐허가 젖어 있다

(손창섭, 사피엔스21, 2012)

비는 흔히 추억과 감상의 소재로 다뤄지지만, 손창섭의 ‘비 오는 날’에서 비는 낭만이 아니다. 이 소설의 비는 축축하고 무겁다. 몸을 식히고 거리를 침울하게 만들며, 전쟁이 남긴 가난과 무기력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제목은 단출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비 오는 날’은 손창섭 전후문학의 한 장면으로 읽힌다. 6·25 전쟁으로 월남해 피난지 부산에서 만난 고향 친구 원구와 동욱, 그리고 동욱의 여동생 동옥을 통해 전쟁의 피폐함을 그린 단편이다. 손창섭은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전쟁과 그 이후의 비일상을 근원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남겼다.

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은 대개 세계를 적극적으로 바꾸는 이들이 아니다. 무너진 현실 속에서 그저 버티거나 체념하거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문다. ‘비 오는 날’의 비가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는 사건을 극적으로 밀어붙이는 장치가 아니라, 이미 무너진 세계의 습기를 독자에게 고스란히 건네는 배경이다. 마른 곳 하나 없는 풍경은 전쟁 이후 개인의 삶이 얼마나 깊이 젖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장마철에 읽는다면, 비는 더 이상 감상의 소품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가 남긴 상처의 질감이다. 눅눅한 방, 가난한 이들의 거리, 벗어나기 어려운 무기력은 지금의 독자에게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비 오는 날’은 비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 그리고 문학이 때로 그 불편한 축축함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준다.

서머싯 몸 ‘비’_ 그치지 않는 폭우가 인간의 위선을 드러낼 때

(서머싯 몸, 민음사, 2021)

서머싯 몸의 ‘비’는 비가 인물들을 가두는 이야기다. 남태평양의 낯선 공간, 그치지 않는 비, 피할 수 없는 동행. 이 단편에서 비는 인물들을 바깥세상과 갈라놓고, 그들이 감춰온 욕망과 위선을 서서히 드러낸다. 장마철 독자가 이 작품에서 마주하는 것은 시원한 빗소리가 아니라, 빠져나갈 수 없는 습기와 팽팽한 긴장이다.

민음사 ‘서머싯 몸 단편선 1’에는 ‘비’를 비롯해 ‘에드워드 버나드의 몰락’, ‘호놀룰루’, ‘점심’, ‘개미와 베짱이’ 등이 실려 있다. ‘비’는 비로 인해 우연히 정박한 마을에서 자유분방한 여성과 도덕적 확신에 찬 선교사 부부가 충돌하며 벌어지는 긴장과 파국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지점은, 비가 자연현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압박처럼 작동한다는 데 있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인물들은 한정된 공간에 머물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종교적 확신과 도덕적 우월감, 욕망, 혐오, 연민이 뒤섞인다.

서머싯 몸은 인물을 손쉽게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스스로 믿는 도덕이 얼마나 쉽게 타인을 재단하는 도구가 되는지, 그 확신이 어떤 균열을 낳는지를 차갑게 짚어낸다.

‘비’를 장마철에 읽는 일은 ‘비 오는 날의 고전’을 읽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은 인간이 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드러내는지 묻는다. 선의일까, 위선일까, 욕망일까. 창밖의 비가 길어질수록 작품 속 비 또한 점점 무거워진다. 독자는 그 습한 공기 속에서 인간 내면의 어두운 결을 마주하게 된다.

유영광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_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상처 입은 마음이 판타지를 통과할 때

(유영광, 클레이하우스, 2023)

유영광의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은 앞선 작품들과 달리 훨씬 밝고 대중적인 결을 지녔다. 이 책에서 비는 우울한 배경만이 아니라 낯선 세계로 이어지는 입구다. 제목 그대로 비가 오는 날에만 열리는 수상한 상점이 있고, 그곳에 초대된 인물이 있다. 장마철 독서가 늘 무겁고 가라앉는 방향일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번 추천 목록에 균형을 더한다.

이 소설은 비가 오면 열리는 수상한 상점에 초대된 여고생 세린이 안내묘 잇샤,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도깨비들과 함께 펼치는 감동 모험 판타지다. 출간 전 해외 6개국에 판권을 수출했고, 텀블벅 펀딩과 런던도서전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은 21개국에서 출간됐고 한국은 물론 미국과 독일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스페인 템플리스상 최고 외국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이 작품의 핵심은 ‘불행을 파는 대신 원하는 행복을 살 수 있는 가게’라는 설정이다. 판타지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상처와 결핍, 위로와 성장의 감정이 놓여 있다. 비 오는 날에만 열린다는 설정은 현실의 우중충한 기분을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장치다. 비는 여기서 무거운 기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상처 입은 마음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문이 된다.

장마철에는 몸도 마음도 쉽게 가라앉는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은 그런 계절에 비교적 가볍게 집어 들 수 있는 책이다. 문학적 고전의 무게보다는 이야기의 흡인력과 위로의 정서가 두드러진다. 비가 계속되는 날, 잠시 현실의 습기를 벗어나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위로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상점의 문을 통과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불행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윌리엄 트레버 ‘비 온 뒤’_ 비가 그친 뒤에야 보이는 마음의 잔상

(윌리엄 트레버, 한겨레출판, 2017)

윌리엄 트레버의 ‘비 온 뒤’는 제목에서부터 장마의 끝을 떠올리게 한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있다. 비가 그친 뒤에야 드러나는 풍경, 젖은 돌길, 식은 공기,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이다. 트레버의 단편들은 바로 그런 순간을 섬세하게 붙잡는다. 감정의 격랑이 지나가고 나면 삶은  조용해지지만, 완전히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 소설집은 단편문학의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였던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집으로, 보통 사람들의 삶을 특별한 이야기로 길어 올리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트레버는 여러 장편으로 부커상 후보에 올랐고, 호손든상(Hawthornden Prize)과 휫브레드 올해의 책을 수상했으며 1999년에는 데이비드 코언 문학상을 받았다.

‘비 온 뒤’의 세계는 극적인 사건보다 미세한 감정의 흔들림에 가깝다. 트레버는 인물의 삶을 큰 소리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후회와 미련, 사랑의 잔상, 뒤늦은 깨달음 같은 감정을 조용히 펼쳐놓는다. 그래서 이 책의 ‘비 온 뒤’는 단순히 날이 갠 상태가 아니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도 마음속에 남는 습기, 완전히 마르지 않은 감정의 상태에 가깝다.

장마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공기는 눅눅하다. 햇빛이 비쳐도 길모퉁이에는 물웅덩이가 남고, 젖은 냄새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비 온 뒤’를 읽는 감각도 다르지 않다. 책을 덮고 난 뒤에야 인물들이 남긴 침묵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된다. 비가 오는 동안 읽는 책이 있고, 비가 그친 뒤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책이 있다면 ‘비 온 뒤’는 분명 후자에 속한다.

장마철 독서는 계절의 불편함을 잠시 잊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책은 비를 잊게 하기보다 비를 다르게 느끼게 한다. ‘디디의 우산’은 비 속에서 함께 견디는 법을 묻고, ‘비 오는 날’은 전후의 젖은 현실을 응시하게 한다. ‘비’는 폭우 속 인간의 위선과 욕망을 들추고,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은 비를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문으로 바꾼다. ‘비 온 뒤’는 비가 지나간 자리에서 마음의 잔상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책장이 조금 더 천천히 넘어간다. 바깥의 빗소리와 종이 위의 문장이 겹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 들게 된다. 장마가 불편한 계절임은 분명하지만, 이 축축한 시간 속에서만 비로소 다시 읽히는 문장들도 있다. 오늘 창밖의 비가 쉽게 그치지 않는다면, 그 빗소리를 배경 삼아 한 권의 책을 펼쳐보아도 좋겠다.

황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