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라이프2026-09-01
[지금, 다시 읽는 책] 128년 전 ‘배울 권리’를 외쳤다…여권통문의 날에 다시 읽는 여성의 역사와 권리
  • 1898년 여성의 교육·직업·참정권 요구…9월 1일 법정기념일로
  • 강주룡의 노동권부터 데이터 격차까지…여성의 권리를 둘러싼 질문은 현재진행형
  • 한국 여성사와 부커상·여성문학상 수상작으로 다시 보는 ‘평등 이후의 평등’
여권통문이 쓰여진 이후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인종·계급·세대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미지=AI로 생성)

128년 전인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여성 김소사와 이소사의 이름으로 한 장의 통문이 세상에 나왔다. 당시 ‘여학교설시통문’, 오늘날 ‘여권통문’으로 불리는 이 글은 여성에게도 교육받을 권리와 직업을 가질 권리, 문명개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선언은 글에 머물지 않았다. 이후 여성단체 찬양회의 결성과 여성교육을 위한 순성여학교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근대 여성운동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됐다. 2019년 양성평등기본법이 개정되면서 매년 9월 1일은 이를 기리는 ‘여권통문의 날’로 지정됐다.

여권통문이 쓰여진 이후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여성에게 학교 문을 열어야 하는지를 논쟁하던 시대는 지났고 법 앞의 평등도 당연한 원칙이 됐다. 그러나 권리를 둘러싼 질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하는 여성은 어떤 대우를 받아왔는지, 사회와 기술을 설계하는 데이터에 여성의 경험은 충분히 반영되는지, ‘여성’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인종·계급·세대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더욱 복잡해졌다.

여권통문의 날을 맞아 1898년의 선언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권리와 권력 문제까지 이어지는 책 여섯 권을 골랐다. 한국 여성사의 출발점을 기록한 연구서부터 여성 노동자의 삶을 복원한 소설, 최근 10년 사이 세계적인 문학상과 논픽션상을 받은 작품까지 함께 추천한다.

권리를 요구한 최초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여권통문’, 새 세상을 열다 (강영경·강영심·김수자·신영숙·안명옥·이방원·정현주, 역사여성미래, 2021)

이번 독서 목록의 출발점인 이 책은 여권통문을 단순히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이라는 한 줄의 역사적 사건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교육권과 직업권, 참정권이라는 세 가지 요구를 실제 삶으로 옮긴 여성들을 따라간다.

한국 최초의 미국 학사학위 취득자로 기록된 김란사와 서양의학 의사 김점동, 서양화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 여성기자 최은희, 독립운동가 윤희순과 김마리아 등의 삶을 통해 한 장의 선언이 어떻게 교육과 직업, 정치 참여의 현장으로 확장됐는지를 보여준다. 1898년의 선언과 이후 여성들의 구체적인 실천을 한 흐름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권통문의 날에 가장 먼저 펼쳐볼 만한 책이다.

여권통문의 의미는 당시 여성들이 당장 모든 권리를 획득했다는 데 있지 않다. 여성 역시 배우고 일하며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독립된 주체라는 주장을 공적인 언어로 세상에 내놓았다는 데 있다. 지금은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 당시에는 하나의 선언이어야 했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한다.

-‘여성사, 한 걸음 더’ (정해은 외 45인·한국여성사학회 기획, 푸른역사, 2024)

여권통문에서 출발한 여성사를 현재에 조금 더 가깝게 가져오려면 이 책이 적합하다. 한국여성사학회가 기획한 책에는 세계 여성사부터 고대·고려·조선과 한국 근현대 여성사에 이르는 40여 편의 글이 담겼다. 특히 ‘한국 여권통문의 날은 어떻게 제정되었나’를 비롯해 근대 여성의 이혼소송, 해방 직후 여성의원 최저할당제 논의, 여성 노동운동 등 지금의 제도와 권리 문제로 이어지는 주제를 다룬다.

여성사를 유명한 몇몇 인물의 성공담으로 정리하지 않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가족과 노동, 복장, 이동, 종교, 정치처럼 일상의 여러 영역에서 여성에게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본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남성 중심의 정치사에서 벗어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일할 권리’가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되기까지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한겨레출판, 2024 개정판)

1898년 여권통문이 여성도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면 그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다. 일을 시작한 여성은 노동 현장에서 어떤 권리를 보장받았을까.

박서련의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은 그 질문을 1930년대 평양으로 가져간다. 실제 인물인 여성 노동자 강주룡은 1931년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이끌었고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다. 작가는 역사 기록 속 몇 줄로 남아 있던 강주룡을 사랑하고 일하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 했던 한 인간으로 되살린다. 2018년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2024년 개정판이 다시 출간됐다.

‘체공녀 강주룡’이 보여주는 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만으로 평등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직장을 얻는 것과 노동자로서 정당한 임금과 대우를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교육권과 직업권을 요구했던 여권통문의 언어가 몇십 년 뒤 노동권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요구로 옮겨가는 순간을 문학을 통해 읽을 수 있다.

법은 평등해졌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까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황가한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0)

여성에게 학교와 직장이 허용된 뒤에도 불평등은 다른 모습으로 남을 수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 그 원인을 ‘데이터’에서 찾는다.

책은 교통정책과 도시계획, 의학연구, 직장, 기술과 제품 설계 등 현대사회의 여러 시스템에서 남성의 신체와 생활 패턴이 사실상의 기본값으로 취급돼 온 사례를 추적한다. 여성에 관한 데이터가 부족하면 정책과 제품을 설계할 때 여성의 경험 역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한국어판은 2020년 출간됐다.

이 책은 2019년 영국 왕립학회 과학도서상과 파이낸셜타임스·맥킨지 올해의 비즈니스북을 잇달아 받았다. 왕립학회는 정부 정책과 의료 연구, 기술, 직장 등에 존재하는 젠더 데이터 격차를 드러낸 점에 주목했다.

128년 전 여성들은 자신들에게도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한 단계 뒤의 질문을 던진다. 사회에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사회가 사용하는 숫자와 기준, 기술과 제도 속에서도 여성은 동등하게 ‘보이는 존재’인가. 여성권의 문제가 명시적인 배제에서 구조와 설계의 문제로 옮겨왔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여성’이라는 하나의 말로 모든 여성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하윤숙 옮김, 비채, 2020)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도 서로 다른 삶과 경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문학으로 펼쳐낸다. 작품에는 세대와 계층이 다른 12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대다수는 영국에 사는 흑인 여성이다. 이들의 삶은 가족과 우정, 직업, 인종차별과 성차별, 성적 정체성의 문제를 가로지르며 서로 연결된다.

에바리스토는 이 작품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와 함께 2019년 부커상을 공동 수상했다. 부커상 역사상 첫 흑인 여성 수상자라는 기록도 남겼다. 한국어판은 이듬해인 2020년 출간됐다.

초기 여성권 운동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명료한 요구에서 출발했다면 현대의 여성인권 논의는 한층 복잡하다. 같은 여성이라도 인종과 계급, 나이와 성적 정체성에 따라 겪는 장벽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결국 ‘여성의 권리’라는 말 역시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여성이 힘을 갖는다면 세상은 평등해질까

-‘파워’ (나오미 앨더만, 정지현 옮김, 민음사, 2020)

나오미 앨더만의 ‘파워’는 여성과 남성의 힘을 아예 뒤집어버린다. 어느 날 소녀들이 몸에서 강력한 전기를 방출할 수 있게 되고 그 능력이 성인 여성에게까지 확산되면서 남성이 신체적으로 약자인 세계가 만들어진다.

설정만 놓고 보면 여성들이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소설이 향하는 곳은 훨씬 불편하다. 힘을 가진 쪽이 바뀌자 폭력과 억압의 방향도 바뀐다. 작품은 성별 그 자체보다 힘의 불균형과 권력의 독점이 만들어내는 폭력을 들여다본다. 한국어판은 2020년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파워’는 2017년 당시 베일리스 여성문학상으로 불렸던 여성문학상(Women’s Prize for Fiction)을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작품의 대담한 상상력과 큰 질문에 주목했다.

여권통문이 남성과 같은 권리를 요구한 선언이었다면 ‘파워’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다는 뜻인가, 아니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쉽게 빼앗을 수 없도록 힘을 분산시키는 것인가. 128년이라는 시간을 가로질러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지는 질문이다.

1898년 여성들은 학교에 갈 권리와 일할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후 여성들은 학교와 직장, 정치와 사회의 수많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섯 권의 책이 보여주듯 권리의 역사는 어느 한 시점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노동의 조건을 바꾸고, 보이지 않던 차별을 데이터로 확인하고, 여성 내부의 서로 다른 경험을 발견하는 과정 역시 그 역사에 포함된다.

그래서 여권통문을 지금 다시 읽는 일은 128년 전 여성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는지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당시 당연하지 않았던 권리가 오늘의 상식이 됐듯,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제도와 기준 가운데 미래에는 불평등으로 평가받을 것이 없는지를 묻는 일에 가깝다. 여권통문의 날은 여성권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인 동시에 아직 남은 질문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주의 신간

왕과 대통령 뒤에 가려진 여성들: ‘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

(최성희,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6)

역사를 기록하는 시선이 달라지면 익숙했던 장면도 다르게 보인다. 조선 근대사와 교육사, 젠더사를 연구해온 역사학자 최성희가 한국 근현대사를 여성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본 ‘여성의 자리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가 오는 9월 10일 정식 출간을 앞두고 예약판매에 들어갔다.

책은 개화기와 대한제국에서 출발해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독재와 민주화운동을 거쳐 최근의 촛불과 응원봉 시위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을 따라간다. 그러나 익숙한 정치 지도자나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 대신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간 여성들을 중심에 세운다. 명성황후와 순헌황귀비를 비롯해 신식 교육을 받은 여학생과 신여성, 항일운동에 뛰어든 여성들, 민주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며 거리와 광장으로 나선 여성들의 삶이 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저자 최성희는 재일 교포 3세로 일본 츄오대학교 종합정책학부에서 재직하며 조선 근대사·교육사·젠더사를 연구하고 있다. 특히 책에는 한국 여성뿐 아니라 재일 조선인 여성, 재한 일본인 여성, 북한 여성과 중국 조선족, 한국으로 이주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겼다. ‘한국 여성사’라는 범주 안에서도 서로 다른 위치와 경험이 존재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여권통문이 발표된 1898년 여성들은 배울 권리와 일할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바로 그 무렵에서 출발해 100년 넘게 이어진 여성의 교육과 노동, 정치 참여와 사회운동의 궤적을 오늘의 광장까지 가져온다. 여권통문의 날에 과거의 선언을 기념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선언 이후 여성들이 실제 역사의 장면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살펴보기에 시의성 있는 신간이다.

황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