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여행기

라이프2026-09-30
[지금, 다시 읽는 책] 우리가 읽은 문장은 정말 작가의 문장이었을까…‘세계 번역의 날’ 다시 읽는 번역문학
  • 같은 원작도 번역가 따라 달라지는 리듬과 뉘앙스…‘정답 없는 선택’이 만드는 세계문학
  • 인터내셔널 부커상은 작가와 번역가가 함께 수상…번역 자체가 문학적 성취로 평가받는 시대
  • AI는 의미를 옮길 수 있지만 ‘작가의 목소리’까지 옮길까…문학번역의 다음 질문
세계 번역의 날을 맞아,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잇는 번역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해본다. (이미지=AI로 생성)

세계문학을 읽다 마음에 남은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몇 번이고 되읽다가 노트에 옮겨 적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한국어 문장은 정말 작가가 쓴 문장일까.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어로, 올가 토카르추크는 폴란드어로,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어로 소설을 썼다. 한국 독자가 만난 단어와 문장, 말투와 호흡은 번역가의 판단을 거쳐 만들어졌다. 원문 한 단어에 대응하는 한국어가 여럿이라면 하나를 골라야 하고, 존대가 없는 언어의 대화에는 등장인물의 관계를 따져 높임말의 정도를 정해야 한다. 원문 특유의 긴 문장을 그대로 끌고 갈지, 한국어 독자가 읽기 쉽도록 나눌지도 선택의 영역이다.

오늘(9월 30일)은 ‘세계 번역의 날(International Translation Day)’이다. 유엔총회는 2017년 5월 24일 9월 30일을 세계 번역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유엔은 전문 번역이 국가 간 대화와 이해, 협력을 돕고 평화와 발전에 기여한다고 그 의미를 설명한다.

올해는 번역의 역할을 더욱 넓게 바라본다. 국제번역가연맹(FIT)이 정한 2026년 주제는 ‘언어 다양성과 언어권(Linguistic Diversity and Language Rights)’이며 ‘이해받는 것의 힘(The power of being understood)’을 부제로 삼았다. UNESCO와 Translation Commons 역시 이날 같은 주제로 행사를 열고 언어 다양성, 원주민 언어, 번역 기술과 데이터 거버넌스 문제를 논의한다.

AI가 순식간에 여러 언어를 바꿔주는 시대다. 그럼에도 문학에서는 오래된 질문 하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번역은 원문의 뜻을 정확히 옮기는 작업일까, 아니면 다른 언어에서 작품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작업일까.

작가는 한 명인데 문장은 왜 달라질까

같은 원작이라도 번역가가 선택하는 단어와 문장 구조, 번역 경로에 따라 독자가 만나는 문장은 달라질 수 있다. (이미지=AI로 생성)

외국어 문장의 모든 단어에 정확히 하나씩 대응하는 한국어가 있다면 번역은 비교적 간단할지 모른다. 현실의 언어는 그렇지 않다. 같은 표현도 시대와 계층, 화자의 감정과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영어의 ‘you’만 해도 한국어에서는 ‘너’, ‘당신’, 이름이나 직함으로 옮길 수 있고 때로는 주어 자체를 생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농담이나 속담, 방언은 더 어렵다. 원문에 충실하려고 직역하면 독자가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고, 한국 독자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원래 문화의 질감이 사라질 수 있다.

번역가는 그래서 단어만 바꾸지 않는다. 어떤 문장을 길게 남길지, 어디서 끊을지, 등장인물이 얼마나 공손하게 말할지, 원문에 없는 설명을 어느 정도 허용할지 끊임없이 판단한다.

국내에서 오랫동안 읽혀 온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어떤 언어를 거쳐 번역했는가’가 독서 경험을 바꿀 수 있다는 사례다. 문학과지성사가 2018년 내놓은 유재원 번역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어 원전을 한국어로 직접 옮긴 번역본이다. 출판사는 이를 국내 최초의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전 번역이 맞고 틀렸다는 문제가 아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를 거쳐 다시 한국어로 도착하는 ‘중역’과 원전에서 직접 옮기는 번역은 서로 다른 경로를 밟는다. 그 과정에서 방언이나 어감, 문장 구조에 대한 번역가의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번역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이루어지기도 한다. 민음사는 지난 3월 밀란 쿤데라 전집을 리뉴얼하면서 8명의 번역가가 기존 번역을 다시 검토해 개정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역시 이재룡의 기존 번역을 다시 다듬어 개정판으로 선보였다. 이 전집은 쿤데라가 정본으로 인정한 프랑스 갈리마르 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원작은 바뀌지 않아도 독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변한다. 오래전에는 자연스러웠던 표현이 낯설어질 수 있고 새로운 연구와 자료가 등장하기도 한다. 같은 고전에 여러 번역본이 존재하는 이유다. 독자는 어느 순간 작가 한 사람의 문학뿐 아니라 그 작품을 자기 언어로 다시 세운 번역가의 선택까지 함께 읽게 된다.

번역을 생각하며 다시 읽는 세계문학

이번 ‘지금, 다시 읽는 책’에는 작품의 명성이나 줄거리만이 아니라 ‘이 문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어떤 작업이었을까’를 생각하며 읽어볼 만한 세계문학 다섯 권을 골랐다. 모두 국내에서 현재 종이책을 구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언어를 옮기는 일이 곧 식민지의 권력을 읽는 일이 될 때

-1938 타이완 여행기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마티스블루, 2025)

1938년 일제 식민지 타이완을 찾은 일본인 소설가 아오야마 치즈코와 그의 통역을 맡은 타이완 여성 왕첸허가 함께 섬을 여행한다. 음식과 풍경을 찾아가는 여행기처럼 시작하지만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 뒤에는 당시 일본과 타이완 사이의 식민지 권력 관계가 자리한다.

소설 속에서 통역자는 단순히 말을 바꾸어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구의 말이 기록되며, 제국의 언어로 쓰인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까지 작품의 핵심으로 들어온다.

한국어판은 김이삭이 옮겼다. 202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은 이 작품의 작가 양솽쯔와 영어판 번역가 린 킹(Lin King)이 공동 수상했다. 이번 수상은 중국어 계열 언어에서 번역된 작품으로는 처음이었다.

100여 개 이야기의 목소리를 하나의 한국어로 엮다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9, 2022)

공항과 호텔, 지도와 박물관, 해부학과 인간의 육체, 여행자와 이주민의 이야기가 100편이 넘는 길고 짧은 글 속에서 이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사건을 따라가는 전통적인 장편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짧게는 몇 문장에서 끝나는 단상부터 중편에 가까운 이야기까지 서로 다른 형식과 목소리가 모여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만든다.

이 책을 번역의 관점에서 읽으면 독특한 구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기록과 에세이, 여행기와 소설의 경계를 오가면서 문장의 길이와 리듬, 화자의 목소리도 계속 달라진다. 한국어판을 옮긴 최성은은 폴란드 문학을 전공하고 토카르추크의 여러 작품을 번역해온 번역가다.

‘방랑자들’은 2018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다. 당시 상은 작가 토카르추크와 영어 번역가 제니퍼 크로프트(Jennifer Croft)가 공동 수상했다. 같은 작품이라도 영어 독자가 만난 ‘Flights’와 최성은 번역으로 한국 독자가 만나는 ‘방랑자들’은 각각 다른 언어에서 새롭게 구성된 작품이다.

낯선 도시를 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큼이나 하나의 작품이 폴란드어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로 이동하는 과정을 생각하며 읽어볼 만하다.

말하지 않는 감정까지 번역할 수 있을까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8, 2021)

영국 귀족 저택에서 평생 집사로 일한 스티븐스가 자동차 여행에 나선다. 여행은 곧 자신의 직업과 선택, 주인에게 바친 충성, 그리고 놓쳐버린 사랑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이 작품으로 가즈오 이시구로는 1989년 부커상을 받았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다. 스티븐스는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품위와 의무, 직업적 태도 뒤에 숨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설명하면서도 독자는 그의 말과 실제 감정 사이의 틈을 읽어야 한다.

이 때문에 번역에서는 단순히 영어 문장의 의미만 옮겨서는 작품 특유의 절제가 살아나기 어렵다. 지나치게 감정을 보충하면 스티븐스라는 인물 자체가 달라질 수 있고, 반대로 영어식 완곡어법을 기계적으로 옮기면 한국어에서는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송은경 번역의 현재 세계문학전집판은 2021년 출간됐다. 한 사람이 평생 애써 감춰온 후회를 아주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소설. 번역가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어떻게 한국어 안에 남길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다시 펼쳐볼 작품이다.

쉼표와 긴 문장까지 작가의 문체라면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2022 개정판)

자동차를 몰던 한 남자가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시력을 잃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백색 실명’은 도시 전체로 번지고, 감염자들은 격리된다. 사회의 규칙이 무너지자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이 드러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돌보고 함께 살아남으려는 연대도 모습을 드러낸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이다. 사라마구의 문체는 번역가에게 특히 까다롭다. 그는 대화를 일반적인 따옴표로 분리하지 않고 서술 속에 섞어 넣으며, 쉼표로 이어지는 긴 문장을 즐겨 사용했다. 노벨재단 역시 그의 특징으로 서술과 대화의 결합, 적은 문장부호와 길게 이어지는 문장을 꼽는다.

한국어판을 옮긴 정영목 역시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잘게 나누기보다 특유의 흐름을 상당 부분 유지한다. 2022년에는 사라마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개정판이 출간됐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다시 읽는다면 줄거리만 따라가기보다 어디에서 문장이 숨을 쉬고, 어디에서 대화와 서술의 경계가 무너지는지 살펴봐도 좋다. 문장부호 하나까지 문체라면 번역은 결국 ‘뜻’ 이상을 옮겨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주인공의 생을 옮기는 법

-살 (데이비드 솔로이 지음, 송예슬 옮김, 서해문집, 2026)

헝가리에서 어머니와 살아가는 열다섯 살 이슈트반은 이웃의 중년 여성과 관계를 맺은 뒤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휩쓸린다. 이후 소년원과 군 복무, 이라크 파병을 거쳐 런던으로 흘러가고 부유층의 세계에 들어선다. 돈과 계급, 욕망을 따라 그의 위치는 극적으로 바뀌지만 정작 이슈트반 자신은 삶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솔로이의 ‘살(Flesh)은 2025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한국어판은 송예슬이 옮겨 지난 6월 출간됐다. 이 작품에서 번역의 어려움은 화려한 수사를 옮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짧은 대사와 현재 시제, 설명하지 않는 공백을 번역자가 친절하게 채워 넣지 않아야 원작의 건조함이 살아난다.

AI는 문학 번역가가 될 수 있을까

짧은 외국어 문장을 입력하면 생성형 AI는 몇 초 안에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을 내놓는다. 긴 문서도 빠르게 처리하고 같은 단어를 문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번역하는 데도 유용하다. 몇 년 전의 기계번역과 비교하면 결과물도 크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소설 역시 AI에 맡기면 될까. 최근 연구는 아직 단순한 ‘그렇다’ 또는 ‘아니다’로 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25년 북미전산언어학학회(NAACL)에 발표된 문학번역 평가 연구는 인간이 출간한 전문 번역과 대규모언어모델(LLM)의 번역을 비교했다. 연구진은 적절한 인간 평가 방식을 사용했을 때 출간된 인간 번역이 LLM 번역보다 일관되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LLM은 인간 번역보다 원문에 더 문자적으로 붙고 표현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경향도 보였다.

반대 방향의 가능성도 있다. 같은 해 Machine Translation Summit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전문 문학 번역가들이 LLM이 만든 초벌 번역을 후편집하도록 했다. 그 결과 처음부터 사람이 번역하는 방식보다 작업 시간을 줄이면서도 비슷한 수준의 창의성을 유지할 가능성이 나타났다. 연구진은 LLM이 문학 번역가를 대체하기보다 작업을 지원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현재의 질문은 ‘AI냐 인간이냐’라는 양자택일보다 어떤 일을 AI에게 맡기고 어떤 판단을 인간 번역가가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다. AI는 초벌 번역과 용어 정리, 여러 표현의 후보 제시에는 강하다. 반면 소설 전체에 걸친 화자의 목소리, 일부러 남겨둔 모호함, 언어유희와 방언, 역사적·문화적 맥락까지 일관되게 판단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 스티븐스가 감정을 감추는 방식이나 ‘살’에서 이슈트반이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장 하나만 들여다봐서는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올해 세계 번역의 날 주제는 이런 문제를 개인의 독서 경험에서 한 걸음 더 넓힌다. 유네스코(UNESCO)와 ‘Translation Commons’는 2026년 행사에서 번역 기술이 언어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설계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AI 시대에는 데이터가 풍부한 언어가 기술의 혜택을 먼저 누리고, 자료가 부족한 소수 언어가 다시 소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 기술이 좋아질수록 번역가가 사라진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오히려 기계가 ‘뜻’을 빠르게 바꿀 수 있게 되면서 인간 번역가가 담당해온 다른 영역이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인물이 어떤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지, 낯선 문화를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모호함을 그대로 남길 것인지, 한국어에서 어떤 리듬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우리가 세계문학에서 기억하는 문장은 한 사람만의 손을 거쳐 온 것이 아니다. 작가가 만든 세계가 번역가의 해석을 지나 또 다른 언어에서 독자에게 도착한다. AI 시대의 세계 번역의 날에 오래된 번역문학을 다시 펼쳐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주의 신간

글쓰기를 금지한 세계에서 ‘시’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시인 황후’

(션 타오 지음, 김원희 옮김, 북스피어, 2026)

세계 번역의 날인 오늘 국내 출간되는 ‘시인 황후(The Poet Empress)’는 중국계 캐나다 작가 션 타오의 판타지 소설이다. 한국어판은 김원희가 옮겼다. 배경은 여성에게 읽고 쓰는 일이 금지된 가상의 제국이다. 기근 속에서 가족을 살리기 위해 황자 테렌의 후궁이 된 웨이는 그가 황제가 되면 더 큰 파멸이 닥칠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세계에서 특별한 힘을 지닌 것은 칼이나 군대가 아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시’다.

문자를 배우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권력이 되는 설정은 세계 번역의 날의 문제의식과도 묘하게 맞닿는다. 어떤 언어로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의 말을 기록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지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와 힘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