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은 해례본

라이프2026-10-07
[지금, 다시 읽는 책] ‘가갸날’에서 한글날까지 100년…우리 글자를 만들고 지킨 책들
  • 1926년 첫 ‘가갸날’에서 2026년 한글날 제정 100주년까지
  • 훈민정음 창제부터 말모이·조선어학회까지…한글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 점자·글꼴·노랫말로 넓어진 한글…앞으로의 100년을 묻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 창제와 사전 편찬에서 점자·디지털 글꼴까지 우리 글을 오늘의 문자로 이어온 시간을 책으로 다시 읽는다. (이미지=AI로 생성)

오는 9일은 한글날, 해마다 돌아오는 한글날이지만 올해는 숫자가 특별하다. 2026년은 우리가 한글날을 기념하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해 처음으로 ‘가갸날’을 열었다. 당시에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음력 9월 29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보고 이날을 기념했다. ‘가갸날’이라는 이름은 한글을 배울 때 사용하던 ‘가갸거겨…’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8년부터 이 이름은 오늘날 익숙한 ‘한글날’로 바뀌었다.

지금의 10월 9일이 자리 잡은 것은 훗날의 일이다.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는 책이 1446년 9월 상한, 즉 그달 초순에 완성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토대로 9월 상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이 한글날이 됐고, 광복 뒤인 1945년부터 다시 이날 기념식이 열렸다.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기도 하다.

여기에 또 다른 100년이 겹친다. 시각장애인이 우리말을 점자로 읽고 쓸 수 있도록 박두성이 만든 한글 점자 ‘훈맹정음’도 1926년 11월 4일 세상에 나왔다. 올해는 국어학자 주시경이 태어난 지 1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야 말로 ‘한글의 해’라 할 수 있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한글의 역사는 1446년에서 1926년을 거쳐 2026년까지 이어지는 한 줄의 연표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자는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사람들이 배우고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적는 방법과 규칙을 다듬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사용하는 문자로 자리 잡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한글은 창제부터 연구, 대중화되는 과정의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세종이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고, 후대의 학자들은 그 글자를 연구했다. 근대의 지식인들은 말을 모아 사전을 만들고 표기법을 정리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일이 저항의 한 방식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의 한글은 종이 위 활자에서 스마트폰 화면과 글꼴, 노랫말과 디지털 데이터의 언어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이번 주에는 ‘한글은 얼마나 뛰어난 문자인가’라는 익숙한 질문에서 조금 벗어나 본다. 한글은 왜 만들어졌는지, 누가 이 문자를 지켜왔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한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책을 통해 다시 읽어본다.

문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세종이 설계한 새로운 글자

-‘훈민정음 해례본’ (김유범·곽신환·김무림 외, 역락, 2020)

한글의 창제 원리를 알고 싶을 때 가장 가까이 다가가야 할 책은 결국 ‘훈민정음’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익숙하게 접한 ‘나랏말싸미…’만으로 해례본 전체를 안다고 하기는 어렵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쓴 어제 서문과 예의를 비롯해 제자해·초성해·중성해·종성해·합자해·용자례, 정인지 서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2020년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어학뿐 아니라 성리학·성운학·한문학 연구자들이 함께 참여해 원문을 현대어로 옮기고 주석과 해설을 붙인 책이다. 해례본의 복잡한 내용을 단락별로 나누고, 전문적인 해설과 함께 일반 독자가 읽을 수 있는 현대어 풀이도 실었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한글을 단순히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문자로만 보기는 어려워진다. 새 문자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에서 시작해 어떤 원리로 소리를 나누고 글자의 형태를 정했는지, 초성과 중성·종성을 어떻게 결합하도록 했는지가 하나의 체계 안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미 한글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기 때문에 글자를 ‘설계한다’는 일이 얼마나 낯선 작업인지 잊기 쉽다. 해례본을 다시 읽는 일은 완성된 문자 뒤에 숨어 있는 질문을 되짚는 일이다. 말소리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그 소리를 어떤 모양으로 나타낼 것인가. 사람들이 쉽게 배우면서도 다양한 소리를 적을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글의 출발점에는 이런 질문들이 있었다.

익숙한 한글을 낯선 눈으로 바라본 언어학자

-‘한글의 탄생’ (노마 히데키, 돌베개, 2022)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문자를 오히려 외부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는 책도 있다.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은 한글의 구조에서 시작해 ‘훈민정음’, 한국어와 한자의 관계, 새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것이 가져온 변화까지 추적한다. 국내에는 개정증보판이 2022년 출간됐다.

이 책의 흥미로운 지점은 ‘한글은 과학적이다’라는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근거를 찾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자는 말과 문자가 무엇인지부터 되묻고, 한자를 중심으로 지식을 기록하던 사회에서 한국어의 소리를 적기 위한 별도의 문자 체계를 만드는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 살핀다.

글자를 안다는 것은 곧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말을 글로 옮길 가능성이 생겼고, 종교·문학·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어를 기록하는 방식도 확대됐다. ‘한글의 탄생’이 문자 구조에 대한 설명을 넘어 ‘지(知)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늘 보던 ‘ㄱ’과 ‘ㄴ’, ‘ㅏ’와 ‘ㅓ’를 잠시 낯선 기호처럼 바라보면 한글은 다시 질문거리가 된다. 문자는 어떻게 태어나며, 한 사회의 지식과 생활은 새로운 문자를 만나 어떻게 달라지는가. 한글날에 이 책을 다시 펼쳐볼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자를 만드는 것보다 어려웠던 일…말과 글을 지킨 사람들

-‘주시경 평전’ (김삼웅, 꽃자리, 2021)

2026년은 주시경 탄생 150주년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근대에 들어 우리말과 한글을 학문의 대상으로 체계화하고 다음 세대에 전한 인물을 이야기할 때 주시경을 빼기 어렵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고 국문 연구와 교육에 힘쓰며 문법서와 연구서를 펴냈다. 국문연구소에서도 활동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혼자 연구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는 점이다. 그 제자들의 학문적 흐름은 이후 조선어연구회와 한글운동으로 이어졌다. 1926년 첫 가갸날을 만든 조선어연구회 역시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김삼웅의 ‘주시경 평전’은 이런 주시경의 삶을 한글 연구에만 가두지 않는다. 개항 이후의 격변기,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국어 연구와 교육을 함께 놓고 한 사람의 언어관이 어떻게 시대와 만났는지를 따라간다.

우리가 지금 ‘한글’이라고 부르는 글자를 사회 전체가 사용하는 문자로 만드는 데는 연구와 교육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같은 글자를 배우고, 같은 규칙으로 읽고 쓰기 위해서는 문자 체계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주시경이 남긴 가장 큰 유산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람이다. 한글을 연구하고 가르칠 다음 세대를 길러냈고, 그 흐름은 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올해 한글날 100주년을 1926년의 가갸날에서 시작해 읽는다면, 그보다 앞서 그 길을 닦은 주시경의 생애도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전 한 권을 만드는 데 50년이 걸린 이유

-‘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책과함께, 2018)

문자를 지키는 것과 말을 지키는 것은 다르면서도 연결돼 있다. 글자가 있어도 어떤 말을 어떻게 적고, 어떤 표현을 표준으로 삼으며, 단어의 뜻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정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함께 쓰는 언어의 기반은 만들어지기 어렵다.

최경봉의 ‘우리말의 탄생’은 우리말 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약 50년에 걸친 과정을 추적한다.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참여한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 광복 이후 ‘조선말 큰사전’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사람과 사건이 등장한다. 책은 사전 한 권을 완성하는 일이 단어를 가나다순으로 늘어놓는 단순한 편집 작업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어떤 말을 표준어로 삼을 것인지, 철자법을 어떻게 통일할 것인지, 이미 쓰이지 않는 옛말을 어디까지 실을 것인지, 새로 생긴 말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하나하나가 논쟁거리였다. 사전을 만드는 일은 결국 ‘우리는 어떤 말을 쓰고 있는가’를 사회적으로 합의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 작업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와도 맞물렸다.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을 계속하던 중 1942년 회원과 관련 인물들이 검거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고 사전 편찬도 중단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당시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 등을 정비하면서 사전 편찬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말의 탄생’을 읽고 나면 사전은 책장에 꽂힌 참고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말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정의한 결과물로 달리 보인다. 세종이 글자를 만들었다면 근대의 한글학자들은 그 글자로 한 사회가 함께 읽고 쓰기 위한 질서를 만들어갔다.

거리와 스마트폰 속 한글은 누가 디자인했을까

-‘한글 디자인 품과 격’ (편석훈, 윤디자인그룹, 2020)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다른 모습의 한글을 만난다. 휴대전화 화면의 글자와 지하철 안내판, 기업 로고, 게임 화면, 간판에 쓰인 한글은 모두 모양이 다르다. 뜻과 소리는 같아도 글자가 놓이는 장소와 목적에 따라 형태는 달라진다.

편석훈의 ‘한글 디자인 품과 격’은 바로 이 ‘글자의 놓임새’를 다룬다. 지역의 정체성을 담은 전용서체에서 기업 브랜드와 게임용 글꼴, 도시 서체, 폰트 저작권까지 글꼴 산업 현장의 사례를 통해 한글이 현대 생활 속에서 어떻게 디자인되는지 보여준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글 디자인을 단순히 예쁜 글씨를 만드는 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안내판의 글씨라면 멀리에서도 잘 읽혀야 하고, 스마트폰 화면이라면 작은 크기에서도 글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이나 지역의 전용서체에는 브랜드와 장소의 인상까지 담긴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가 소리를 어떻게 글자의 형태로 바꿀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현대의 글꼴 디자인은 그 글자를 오늘의 환경에서 어떻게 잘 읽히고 기억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매체가 바뀔 때마다 한글도 새로운 옷을 입는다.

AI 시대에도 이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검색창에 입력하는 문장, 음성인식으로 변환되는 말, 번역기가 처리하는 문장,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한국어 모두 오랜 시간 사람들이 정리하고 축적해 온 한국어 문자와 언어 자료 위에서 작동한다. 한글을 미래의 문자로 만드는 일 역시 새로운 기술 환경에서 정확하게 읽고 쓰고 전달할 방법을 계속 찾는 과정에 가깝다.

이주의 신간

100년 뒤에도 우리는 한글을 아름답다고 느낄까:

‘한글’ (영케이·김이나·배시은·안대희·임혜은 외, 민음사, 2026)

오는 9일 한글날에 맞춰 출간되는 ‘한글’은 올해 같은 시점에 읽기 좋은 책이다. 한글날 100주년을 기념해 네이버 ‘한글한글아름답게’ 캠페인과 민음사 인문잡지 ‘한편’이 함께 기획했다. 가수 영케이와 작사가 김이나, 시인 배시은, 한문학자 안대희, 활자체 디자이너 임혜은을 비롯해 데이터 분석가와 국어학자, 한국어 교육자 등 10명이 참여했다. 이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한글의 아름다움을 언제 느끼나요?’다.

이 질문이 흥미로운 것은 한글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정답으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랫말을 만드는 사람에게 한글은 소리와 리듬을 담는 재료가 되고, 시인에게는 감각을 만드는 문장이 된다. 글꼴을 만드는 사람은 글자의 형태를 보고, 연구자는 문자와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들여다본다.

앞에서 읽은 책들이 한글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준다면 이 책은 2026년 현재 사람들이 한글을 어떻게 사용하고 느끼는지를 보여준다. 100년 전 조선어연구회의 사람들이 ‘가갸날’을 만들어 우리 글자를 기념하기 시작했다면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한글은 연구자의 책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노래와 시, 디자인과 데이터, 스마트폰과 일상 대화 속에서 계속 쓰이고 있다.

문자는 한 번 만들어졌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세종이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고, 주시경과 후대의 학자들은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말을 모으고 규칙을 정해 사전을 만들었으며, 박두성은 눈으로 글을 읽기 어려운 사람도 우리말을 읽을 수 있도록 점자를 만들었다. 오늘의 디자이너와 작가, 이용자들은 새로운 매체와 생활 속에서 또 다른 모습의 한글을 만들어간다.

1926년 사람들이 처음 ‘가갸날’을 기념한 이유가 우리 글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면, 1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질문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한글을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 한글날 제정 100주년은 지나온 한 세기를 기념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다음 100년의 한글을 생각해볼 출발점이다.

황주영 기자